[전우용의 공간 너머] 도시민의 이중적 정체성

입력 2010-08-26 18:13


1982년 3월 27일, 지금은 사라진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역사적인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이 열렸다. 맞붙은 두 팀은 서울을 연고로 한 MBC 청룡과 대구의 삼성 라이온스였다. 대통령이 직접 시구를 했을 만큼 전 국민의 관심을 끈 경기였고 장내는 당연히 만원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벌어진 경기였지만, 서울 팀보다는 상대팀을 응원하는 사람이 오히려 많았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서울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조차 서울 팀이 이기기를 바라서라기보다는 상대팀이 지기를 바라서 응원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벌어진 다른 팀들과의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MBC 청룡은 해태 타이거즈와 붙을 때에도, 롯데 자이언츠와 붙을 때에도, 제대로 홈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당시 서울 인구는 900만명 정도였지만, 80% 가까이는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세기 전 서울 사람은 20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큰 폭으로 늘어났지만 광복 직후에도 100만명 미만이었다.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은 휴전 이후 수도 재건 사업이 본격 진행되면서부터였다. 1954년 120만명이던 인구가 두 배로 느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6년이었고, 그 인구가 또 두 배로 늘어나는 데에는 9년이 걸렸다. 1970년 500만명을 훌쩍 뛰어넘은 서울 인구는 3∼4년마다 100만명씩 늘어 1988년 1000만명을 돌파했다.

이런 급증이 자연 증가의 결과가 아님은 물론이다. 매년 30만명 정도가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몰려와 먼저 고향을 떠나온 친지를 찾아 서울 각처에 정착했다. 이들은 서울에 살면서도 대개는 자기가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 사람 행세할 때에는 고향에 다니러 갔을 때뿐, 서울에서는 다시 충청도 사람이 되고 전라도 사람이 되고 경상도 사람이 됐다. 거주지 못지않게 출신지를 중시하는 풍토에서 많은 사람이 그냥 서울 사람이 아니라 ‘어느 지방 출신’ 서울 사람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물론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온 것은 1969년 패티김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친 ‘서울의 찬가’ 가사대로, ‘서울에서 살고 싶어서’다. 돈 벌고 출세할 기회가, 하다못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기회조차도 서울에 더 많았다. 그러나 이들이 서울에서 ‘죽을’ 생각까지 했는지는 의문이다. 1972년 김상진은 누가 뭐래도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라고 노래했다.

요즘도 간혹 대중 강연 자리에서 “서울에서 돌아가시고 싶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청중석에서는 알 듯 모를 듯한 쓴웃음이 번지곤 한다. 많은 사람이 서울에서 벌 만큼 벌고, 출세할 만큼 하고 난 뒤에는, 아니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경우에라도, 은퇴한 뒤에는 고향 가까운 곳에서 전원생활을 누리다가 죽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갖고 산다. 그러나 이 ‘소박한’ 소망이 지금 사는 곳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자면, 서울 사람 다수가 결국 자신이 이 도시에서 남은 평생을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울을 ‘한탕 하고 난 뒤에’ 언젠가 떠날 곳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현재의 젊은이들도 부모 세대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저 돈 벌 기회만 생긴다면, 이 동네가 어찌되든 장래에 어떤 문제가 생기든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이 도시민 의식을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는 서울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도 다 비슷비슷하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상태가 심각한 수준을 넘어 위기상황이라고 한다. 이 위기가 지자체장이나 도시 행정가들의 무리한 정책에서 비롯됐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당장의 기회’를 잡기 위해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도시민의 욕망을 대변했을 뿐이다. 내가 사는 이 땅이 곧 고향이요 내 후손들이 삶을 펼쳐갈 터전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도시 공간에 대한 무리한 욕망을 다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우용<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