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현실서 불가능한 일이 부산서 벌어지고 있다”… ‘2010 인디고 유스 북페어’ 참관기

입력 2010-08-26 18:13


모든 것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됐다. ‘가치를 다시 묻다.’ 그것은 꽤나 추상적이지만, 젊은이들이 자기 인생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출발점이 될 만한 질문이었다. 불행하게도 학교 교육에서는 생략하고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질문 하나를 안고 일단의 젊은이들이 2008년부터 지구 횡단에 나섰다. 부산의 청소년 인문학 서점 ‘인디고서원’에 모여 공부하는 중·고생들과 이 서점을 거쳐 간 대학생들이다. 5∼10명으로 구성된 젊은 팀은 미국,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는 물론 아프리카, 중남미 쿠바까지 갔다. 세계적 석학, 작가, 시민운동가, 예술가 등 수많은 선생님을 만났고, 그 여정과 인터뷰 내용을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2007년 기획한 이래 꼬박 3년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지난 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간 부산에서 열린 ‘2010 인디고 유스 북페어’는 긴 여정의 종착지였다. 이들 젊은이는 책으로 읽거나 직접 만난 선생님들을 부산으로 초청했다. 전국에서 몰려온 300명 안팎의 청소년들과 함께 가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국내 유일의 청소년 국제 인문학 행사다.

행사 3일째인 20일 오후 3시.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컨벤션홀은 제법 국제학술대회장 분위기를 풍겼다. 전면에는 ‘청년! 새로운 시대의 연대를 꿈꾸다’라는 포럼 제목이 게시돼 있었다. 해외 초청자 30명 가운데 이 포럼을 담당한 연사 10여명이 앞에 앉았다. 특이한 것은 연사도 청중도 모두 젊다는 점이다. 객석에는 교복 차림 여학생이 많이 보였고, 부모 손에 이끌려온 초등학생들도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오바마가 누군지도 잘 모르던 2007년, 고교생 신분으로 오바마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오바마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는 민주당원이 아니라 청년들이었다. 2008년 미국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정치 참여와 연대가 세계 모든 곳에서 재현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는 함께 정의의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몰리 카와하타·‘버락 오바마를 위한 학생들’ 대표·미국 UC버클리 학생)

“우리 셋은 10대 후반 소녀들이고 동네 친구들이다. 2005년부터 ‘비닐봉지 사용을 줄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작은 도시 넬슨에서 비닐봉지 사용량을 20%가량 줄였다.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말라.”(뉴질랜드에서 온 환경단체 ‘그린 틴즈’ 설립자들)

“열 살 때 가족이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1년 전 조국 이란에서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조작된 선거였다. 이란 사람들은 분노해 거리로 나왔고, 정권은 억압으로 대응했다. 그걸 보면서 ‘나도 책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란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리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에 이란을 지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현재 1000명 이상이 회원으로 가입했다.”(모나 스트린드버그·‘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이란인들을 위한 지지자’ 조직·스웨덴 웁살라대 학생)

케냐의 청년 활동가 자반 아푸두는 2007년 케냐 대선 후 폭동 사태의 상흔을 치유하고 평화를 호소하려 조직된 ‘2009 케냐 청소년평화회담’ 사례를 발표했다. 카이자드 밤가라 등 인도 청년 3명은 2008년 뭄바이 폭탄테러 이후 시작된 젊은이들의 재건 운동 ‘라이즈 업 인디아’를, 네팔 여성 수바 싱과 만디라 라우트는 네팔 소식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청소년들이 만드는 국제잡지 ‘투데이유스아시아(TYA)’를 소개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객석의 학생들은 질문을 하느라 연사들 앞에 줄을 섰다. 부산 경원고 3학년 안민숙양은 “수업 빠지고 친구와 함께 왔다”며 “평소 학교에서 들을 수 없는 얘기들, 친구들과 하지 않는 얘기들, 자극이 되는 얘기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행사는 저녁 문화공연으로 이어졌다. 부산문화회관 소극장을 학생들이 가득 채웠다. 인도 현대미술가 사비 사와르카르가 등장해 “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 그게 예술입니다”라는 예술관을 그림과 함께 소개했고, 쿠바에서 온 남녀듀오 아리엘 디아즈와 일리아나 엑토르가 기타 연주와 함께 사회성 짙은 노래들을 들려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야생동물보호운동가로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저자인 로렌스 앤서니는 “한국 젊은이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먼 길을 왔다”며 인사했다.

해외 초청자 30명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이들이다. 한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들을 찾아내고 초청했을까? 행사 총책임자 이윤영(이화여대 사회학과 3년)씨는 “책을 통해 알게 됐거나, 우리가 인터뷰한 석학들이 소개해준 사람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접촉했다”며 “다양한 인종과 국가, 문화의 인물들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청소년들의 마음 속 장벽을 깨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5일간 일정은 강연회, 토론회, 공연, 책 전시회 등으로 이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은 자비로 숙식을 해결하며 행사에 참가했다. 전북 군산에서 고2와 중3 두 딸을 데리고 참석했다는 김순희(49)씨는 “2008년 인디고 유스 북페어에도 왔는데, 아이들이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우리 애들이 앞으로 뭘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길 바라고 그런 점에서 인문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스웨덴 웁살라대 브라이언 파머 사회인류학 교수는 200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참석했다. 그는 인디고서원에서 만드는 청소년 잡지 ‘인디고잉’의 국제판 편집책임자다. 파머 교수는 “한국의 각박한 교육현실을 고려할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전 세계 지식인들과 창조적 실천가들을 함께 모으고, 정의나 가치와 같은 심오한 주제를 14∼19세의 청소년 수준으로 끌고 온 것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2008년 ‘인간’을 주제로 첫 행사를 가진 인디고 유스 북페어는 2년에 한 번 열린다. 다음 주제는 무엇일까? 경제와 경쟁의 시대에 인문학과 윤리 문제를 붙잡고 있는 젊은 이상주의자들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부산=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