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고종의 아지트 重明殿

입력 2010-08-26 19:19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29일 문을 여는 중명전은 오롯이 고종의 공간이었다. 1897년 정동여학당 터에 황실 도서관으로 건립됐다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불이 나자 고종이 이곳을 편전(便殿·집무실)으로 사용하면서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지가 됐다.



덕수궁의 별궁 격인 이 작은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먼저 을사늑약이다. 러일전쟁 승리로 기세가 오른 일본은 1905년 11월 18일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맺었다. 일본군들이 정동 골목과 중명전을 에워싼 가운데 어전회의를 열도록 해 조약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종이 거부하자 심야에 외부대신 직인을 탈취해 날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 다른 역사는 1907년 6월의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 고종은 그해 4월 중명전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의 특사에게 밀지를 주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통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도록 했다. 그러나 되레 이 사건의 역풍으로 퇴위 압력을 받아 그해 7월 20일 순종에게 양위했다.

고종이 덕수궁 내 함녕전으로 거처를 옮긴 뒤 1901년과 1925년 두 번의 화재를 겪었고, 일제가 덕수궁을 축소하면서 아예 궁역에서 제외하자 외국인 사교클럽 등으로 전전하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구황실 재산으로 등록됐다.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거처로 사용됐고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가 사업을 하면서 은행에 저당 잡혔다가 1977년 민간에게 매각되기도 했다.

일본의 침략에 치를 떨면서도 이렇듯 역사의 현장은 곧잘 잊고 산다. 정동극장 주변의 이름난 추어탕 집은 알아도 그 뒤편의 중명전은 몰랐고, 이 고종의 아지트를 많은 기업체가 사무실로 사용하면서도 별다른 역사적 부채감을 갖지 않았다. 이번 복원으로 반갑긴 하지만 그동안 연구가 얼마나 부족했던지 을사늑약이 중명전의 어느 방에서 체결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건축가 역시 러시아 공사관을 설계한 사바친으로 추정할 뿐 정확한 기록이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13년간 대한제국의 중심이었던 덕수궁의 궁역을 되찾는 것도 과제다. 지금 덕수궁은 대한제국 시절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다. 일제가 왕조의 유산을 없애기 위해 땅을 조각내 팔았기 때문이다. 미국 대사관이 용산으로 옮길 때 중명전 옆 대사관저도 이전해 덕수궁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방안을 공론에 부칠 만하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