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비 1등급 255㎥ 아파트 지분 10%만 산다?

입력 2010-08-26 18:04


집에 관한 즐거운 상상 세가지

“나, 이사했어.”

회사원 최모(41)씨가 최근 동료들에게 이 말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돌아온 질문은 “어디로?”였다.

“마포.”

단독주택인지, 빌라인지 묻는 이는 없었다. 으레 아파트일 거라고 생각해 넓이부터 묻는다. “몇 평이야?”

“25평.”

집의 ‘위치’와 ‘면적’ 다음으로 사람들은 세입자냐, 소유자냐를 궁금해 했다. “샀어?”

“전세야.”

여기까지였다. 최씨의 새 집에 관한 대화는 위치, 면적, 소유의 세 가지를 확인한 뒤 사실상 막을 내렸다. 둘러앉았던 동료들이 집 얘기를 계속하긴 했다. “우리 동네는 교통이 별로야.” “우리 집도 25평인데 애가 둘이라 좀 좁더라.” “전셋값 많이 올랐다며, 얼마냐.”…. 결국 위치, 면적, 소유의 얘기다. 우리가 사는 공간을 설명하는 방법, 좀 다른 거 뭐 없을까?

1. 천장

“너희 집 몇 평이니?”… “255㎥야”


건축가 오영욱(오기사디자인 대표)씨는 최근 한 일간지 기고문에서 “아파트 분양광고에 85㎡ 대신 255㎥라고 표기되는 날을 상상해본다”고 했다. 이런 얘기다.

집은 평면이 아닌 입체 공간이고, 입체를 측정하는 기본 공식은 ‘가로×세로×높이’다. 그런데 우리는 집을 바닥의 가로×세로만 계산해 ‘25평’ 또는 ‘85㎡’라고 부른다. 천장 높이가 2.2m인 115㎡ 집과 3m인 85㎡ 집이 점유하는 공간의 부피는 거의 같은데, 왜 바닥만 보고 집을 평가하나. 이제 천장도 좀 보자.

지난 22일 만난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건축 공부할 때 얘기를 꺼냈다.

“19세기 바르셀로나는 부자 도시였어요. 도시계획으로 5층짜리 주상복합건물이 대거 들어섰죠. 1층은 상점이고, 2층은 건물주인 귀족들이 살고, 3∼5층은 임대를 했습니다. 이 건물들은 2층 천장이 제일 높아요. 3층부터는 올라갈수록 낮아지죠. 집의 가치에 천장 높이를 반영한 겁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아파트 천장 높이는 거의 예외 없이 2.2∼2.3m였다. 이 높이는 어떻게 나온 걸까?

“산업혁명 이후 서구 건축은 합리주의가 지배했어요. 인간 행동이 가장 합리적으로 담길 수 있는 공간이 좋은 집이다, 천장 높이는 ‘평균 키의 사람이 팔을 뻗어 닿지 않을 정도’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이 기준이 우리나라에서 건설업체의 경제성 논리와 맞물려 아파트 천장이 최대한 낮아졌어요.”

용적률에 따라 아파트 전체 높이는 제한돼 있다. 그 높이 안에서 더 많은 집을 지으려고 천장을 낮추다 보니 더 낮추기 힘든 2.2m가 당연한 규격처럼 돼버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오씨는 최근 이 규격이 서서히 깨져가는 조짐을 본다고 했다.

“요즘 새로 생기는 카페들 보세요. 대부분 천장을 뜯어내서 콘크리트와 보를 드러내요. 공간 높이를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거죠. 그러면 더 넓어 보이고, 개방감을 주고, 쾌적하니까. 높이의 가치를 인정하는 건데, 아파트에도 이런 움직임이 있어요.”

지난 2월 분양된 인천 당하동 힐스테이트4차 1∼2층은 천장 높이가 2.6m로 다른 층보다 훨씬 높다. 현재 분양 중인 경기도 수원 정자동 SK스카이뷰는 모든 층의 높이를 2.4m로 일반 아파트보다 10∼20㎝ 높였고, 입주를 앞둔 서울 한강로2가 센트레빌 아스테리움 용산은 층고를 2.6∼2.8m로 했다. 모두 미분양 한파를 극복하기 위해 집에 남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전략이다.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조앤 마이어스-레비 교수팀은 2007년 천장 높이의 가치를 실험으로 입증했다. 참가자들에게 천장이 2.4m, 2.7m, 3m인 세 공간에서 퍼즐 등 문제를 풀게 했더니 천장이 30㎝ 높아질 때마다 창의적 사고력이 배 이상 향상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높이 2.2m의 115㎡와 3m의 85㎡가 비슷한 가격에 거래되는 날이 올까? 서울 인사동 쌈지길을 설계한 최문규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집 고를 때 천장 높이 따지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도 집을 면적인 제곱 피트로 거래해요. 하지만 천장 높은 집은 반드시 매물 광고에 ‘하이 실링(high ceiling)’이라고 표기합니다. 가격도 더 비싸죠. 그동안 우리 건설업체들은 소비자에게 ‘집은 이런 것’이라고 획일적인 공간을 주입시켜 왔어요. 이제 다른 분야처럼 집에도 다양성에 대한 욕구가 터져 나올 겁니다.”

마침 핵가족화가 가속화되면서 ‘넓은 집’의 인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2. 연비

“차 연비 15㎞”… “집 연비 1등급”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12일 “2012년부터는 집을 팔려면 의무적으로 매물 광고에 집의 에너지효율등급을 명시해야 한다”며 오래된 주택이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갖춰야 할 항목들을 보도했다. 자동차 살 때 연료 효율 따지듯 이제 집도 ‘연비’ 따져가며 고르게 되니, 집을 팔려면 지금부터 전기 가스 등 에너지가 덜 들도록 보수공사를 하라는 얘기다.

이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럽연합(EU)이 마련한 건축물 에너지 절감 지침 때문이다. EU 회원국들은 2012년부터 부동산 광고에 에너지 효율 표시를 의무화해야 한다. 그린, 앰버(황색), 레드 같은 색깔이 됐든, 1∼5등급의 숫자가 됐든 유럽 모든 주택에 ‘연비’를 매겨 집값에 반영되도록 유도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집도 매일 에너지를 소모하는 생활공간인데 우리는 그동안 차 살 때 그렇게 꼼꼼히 따지는 연비를 집 살 때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장철용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우리나라에서 집은 거주공간보다 부동산이란 의미가 더 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차는 갖고 있을수록 값이 떨어지지만 집은 갖고 있을수록 값이 올랐잖아요. 위치와 면적이 가져다주는 재산 가치에 비하면 에너지를 아껴 얻는 이익쯤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 거죠. 하지만 사정이 좀 달라졌어요. 우리 정부도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30% 감축하겠다고 선언한 터라 목표치를 맞추려면 자동차만 바뀌어선 안 돼요, 집도 달라져야 할 겁니다.”

우리나라도 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 인증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신축 공공주택과 업무용 건물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 신청하면 에너지 소모량 추정치에 따라 1∼5등급을 받는다. 하지만 신청하는 건물만 등급을 매기는 ‘자발적 인증’ 제도다.

정부는 최근 ‘주택의 연비’에 관한 연구용역 두 건을 발주했다. 기존 아파트와 빌라, 단독주택까지 모든 집의 에너지효율등급을 평가하기 위해 기준을 만들고, 모든 집주인이 이 등급을 받도록 의무화하려면 어떤 인프라가 갖춰져야 하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장 연구원은 ‘의무화 대비 인프라 구축 방안’ 연구를 맡았다.

“세부적으로 고민할 부분이 많아요. 다양한 주택 형태의 에너지 효율을 어떤 잣대로 평가할 거냐, 평가는 누가 할 거냐, 등급 표시 의무는 어느 선까지 부과할 거냐…. 그런데 결국 목적은 연비 좋은 집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거예요. 소비자가 그런 집을 선호해야 에너지 절약형 주택이 늘어나서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날 것 아닙니까. 결국 인센티브를 많이 줘야 할 겁니다.”

저공해 하이브리드 자동차 구매자에게 세금을 감면해주듯 에너지 효율이 높은 집에는 세제 혜택 등 각종 지원을 해줘야 할 거란 얘기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타당성 검토를 한 다음 2013년부터 단계적으로 에너지효율등급 인증제를 의무화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집 살 때 “에너지 효율이 몇 등급이죠?”라고 묻게 될까.

장 연구원은 “주택 연비의 가치가 위치나 면적의 가치를 넘어서긴 어려워도 조만간 집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중요한 항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직 단언하긴 어렵지만 집 사서 돈 버는 시대는 저물어간다는 얘기도 슬슬 나오고 있다.

3. 지분

“30평짜리 아파트 지분 10% 샀어”


그동안 집은 사거나 빌리는 것이었다. 너무 자주 사고팔면 투기가 됐고, 한번 빌리면 거주가 보장된 기간은 2년이었다. 이런 부동산 시장의 룰을 바꾸겠다는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빌리는 값으로 원하는 만큼 살고, 집 한 채 다 사려면 부담스러울 테니 주식 거래하듯 쪼개서 일부만 사라는 것이다.

민간 기업인 한국부동산거래소가 지난주 발표한 ‘지분형 아파트’ 사업의 골자는 이렇다. 거래소가 아파트 한 채를 매입해 ‘소유권’을 갖는다. 실수요자는 집값의 40%를 내고 무기한 ‘거주권’을 확보한다. 나머지 60%는 투자자들이 원하는 지분만큼 돈을 내고 ‘수익권’을 갖는다.

투자자는 거래소를 통해 수익권을 제3자에게 매각할 수 있다. 소유권이 바뀌는 게 아니어서 양도세 대신 주식 팔 때처럼 거래소에 수수료를 내고, 집값이 올랐으면 지분만큼 차익을 가져간다. 거주자도 집을 옮기고 싶을 때 거래소를 통해 거주권을 매각하며 역시 40% 지분만큼 집값 상승 수익을 얻는다. 투자금은 모두 부동산신탁회사에 맡겨 거래소가 부도나도 보호된다는 주장이다.

홍종득 한국부동산거래소 전무는 “현재 서울 경기 인천 부산의 미분양 아파트 5000여 세대의 시공사들로부터 지분형 거래 요청이 접수돼 있다. 9월에는 부산 강서구 퀸덤아파트 400여세대, 10월엔 서울 지역 아파트를 대상으로 거주자와 투자자 모집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 아이디어로 특허를 얻은 거래소 측은 아파트 가격의 거품을 제거하는 거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거품이 잔뜩 낀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이 없는데, 실수요자와 투자자가 부담을 나누면 거품 제거 효과가 난다는 것이다. 홍 전무는 “세입자는 계속 오르는 전셋값이 불안하고, 투자자는 거액을 선뜻 내놓기 불안한 시장에서 하나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집의 소유 여부를 물을 때 “지분이 몇%냐”고 해야 하는 시대가 오는 걸까? 이 아이디어가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 통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투자자 모집이 잘 될지, 수익권과 거주권이 원활히 거래될 만큼 수요가 생겨날지 미지수다. 어쨌든 집에 관해 새로운 실험이 하나 시작됐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