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성혜영] 집으로 가는 길
입력 2010-08-26 19:00
귀국을 앞두고 짐을 싸면서 교토부 북부의 항구도시 마이쓰루(舞鶴)가 마음에 걸렸다. 제법 두툼한 가이드북이라야 겨우 몇 줄 언급되는 그곳에 꼭 다녀와야겠다고 뒤늦게 나선 것은 역사에 대한 알량한 염치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해군 병참기지였다는 이곳은 2차대전 종전 후 한국 러시아 중국 등지에 ‘억류’되었던 60만명 이상의 일본인을 귀환시켰던 항구다. ‘요코 이야기’ ‘안벽의 어머니’ 등 소설과 노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눈물과 상봉의 항구가 이곳이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낭만적이기까지 한 붉은 벽돌 건물의 군국주의 시대 군수창고들은 박물관이 되었다. ‘인양(引揚)기념관’에서 살펴본 전쟁의 비극은 차고 넘쳤지만, 어쨌든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오미나토항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떠다니는 섬’ 우키시마호(浮島丸)가 침몰해 550여명(일본 정부 공식 통계)이 목숨을 잃었던 곳도 바로 이곳 앞바다였다. 귀국길에 오른 한국인 강제노역자와 그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사상자 수, 침몰 원인, 배상 문제를 둘러싼 불신의 골은 지금도 깊다. 기억 속에서도, 우키시마호 희생자 위령비 속에서도 고통은 생생하지만 바다도 세월도 그저 무심하다. 모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광포한 바람 속을 떠돌다 모두가 돌아가는 곳, 그곳이 ‘집’이다. 나도 1년여의 일본 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시절을 잘 만난 덕분이라 해도 될까. 누군가 목숨을 걸고 일했고 목숨을 걸고 떠나고자 했던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살다 가려니 송구한 마음이 컸던 게다. 눈에 밟히는 것이 많았다. 못했던 일에 대한 미련도 없지 않았지만, 돌아갈 집이 있었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족들보다 조금 먼저 귀국해 혼자 들어온 집은 아주 낯설었다. 집안 구석구석 손길이 닿지 않은 티가 역력했다. 작은 정원에는 잡초들이 무성했다. 기다렸다는 듯 화장실 세면기의 배관 어딘가가 피식거리며 새기 시작하더니 싱크대 배수구 밑으로도 물이 똑똑 떨어졌다. 뭐부터 손대야 하나 싶어 빗속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려니 나 자신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처럼 느껴졌다. 아, 내가 바로 하나의 ‘우키시마(浮島)’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남편도 아이들도 제각각 어느 바다엔가 떠다니는 또 다른 우키시마들인 셈이다.
이전에 몇 차례의 객지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부재의 실체를 깨닫게 된 것은 한참만의 일이었다. 시어머니였다. 남편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분, 용렬한 나를 ‘능력 있고 착한 며느리’로 만들어주신 분이다. 폐암으로 작년에 돌아가셨다. 거짓말처럼,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어떤 계획도 바꾸지 않아도 될 수 있게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가셨다.
집은 꿈이 아니라 항구다. 때때로 환멸과 권태가 위협하는 항구다. 따뜻하고 안전한 항구를 만들고 지키는 일, 그게 이제는 내 몫인가 싶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