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상품 가격표가 MD의 1년 성적표

입력 2010-08-26 18:08


대형마트 ‘추석 전쟁’… 대박 만들기

“그쪽도 활꽃게를 준비 중이랍니다.” 시판을 20여일 앞둔 지난달 하순이었다. 어촌에서 정보는 빠르게 돌았다. 1년 동안 활꽃게에 매달려 온 롯데마트 수산물 담당 상품기획자(MD) 여형희(35) 대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난해엔 같은 기간에 경쟁사인 이마트와 충돌하지 않았다. 이럴 땐 한시라도 빨리 현장에 가는 수밖에 없다.

D-20, 허를 찔리다

꽃게는 매년 암게가 알을 낳는 6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금어기다. 8월 16일 0시에 꽃게잡이가 재개되고, 대형마트의 가을은 이때부터 시작되는 ‘햇꽃게 대전’과 함께 찾아온다. 어느 업체가 물량을 미리 확보해 먼저 치고 나가느냐가 10월까지 계속될 꽃게 전쟁의 초기 판세를 좌우한다.

롯데마트는 지난해 햇꽃게 행사를 선점해 재미를 봤다. 올해는 매출 목표를 지난해보다 20% 높여 잡고, 지난 4월 꽃게잡이 어선들을 확보하고 있는 충남 태안의 수산업체와 계약했다. 이 업체가 꽃게를 잡은 뒤 포장해 경기도 오산과 경남 김해의 롯데마트 물류센터로 가져오면 전국 매장에 공급된다.

8월이 다가올 무렵 태안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는 어획량이 많고 꽃게 질도 좋을 것 같다.” 매출 증대 목표를 당초 20%에서 60%로 더 높였다. 수산업체도 지난해 12척이던 꽃게잡이 배를 18척으로 늘렸다.

이마트가 꽃게잡이 재개 첫 주부터 대대적인 햇꽃게 행사를 준비 중이란 소식이 변수였다. 판단이 필요했다. ‘어떤 마케팅 전략을 준비했을까?’

이마트의 꽃게 작업장은 전북 부안 격포항이었다. 롯데마트 작업장은 충남 태안 신진항이다. 꽃게를 잡는 곳은 군산 앞바다로 비슷했다. 어장에서 항구까지 거리는 신진항이나 격포항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 신선한 꽃게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격포항이 신진항보다 남쪽에 있는데, 혹시 우리보다 좀 더 남쪽에서 잡고서 ‘남방 꽃게라 더 좋다’고 광고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꽃게는 수온이 낮을수록 살이 단단해 맛이 좋아요.”

농산물은 주산지나 품종으로 차별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수산물은 힘들다. 특히 8월 꽃게는 잡히는 곳이 대동소이하다. 들어오는 항구만 다를 뿐.

“우리 배가 조업하고 있으면 바로 옆에 경쟁사 배가 나타나 꽃게를 잡을 정도예요. ‘전용선단이 있다’ ‘24시간 안에 매장에 도착한다’… 아무리 말해봐야 상품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이런 판은 결국 가격이 승부를 가른다. 가격을 낮추려면 물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하지만 대형마트 두 개가 맞붙으면 물량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이 시기에 잡히는 꽃게량은 한정돼 있다.

“어선과 운반선 다시 한번 체크해 주세요.”

신진항에 내려간 여 대리는 현지 업자들 단속부터 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다. “1㎏당 500원 더 주겠다”는 말에 뱃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는 일이 무시로 일어난다.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꽃게는 지난 19일 두 대형마트에 동시에 깔렸다.

‘꽃게금어기 끝나자마자 잡은 놈들이라서 살이 많이 올랐구먼.’(이마트)

‘금어기 이후 첫 출항, 살아있는 햇꽃게.’(롯데마트)

광고 카피는 판에 박은 듯 비슷했다. “다른 카피가 나올 게 없다. 결국은 가격”이라던 여 대리의 판단은 옳았다. 치열한 탐색전 끝에 나온 두 마트의 가격은 100g당 890원(이마트)과 880원(롯데마트). 10원 차이였다.

팔려나가는 속도는 지난해보다 두 배 빨랐다. 수요가 예상보다 많아 원래 주문한 양으론 모자랐다. 미리 계약하지 않은 배에서도 꽃게를 확보하기 위해 여 대리는 동분서주했다.

대품(大品)을 확보하라

꽃게 전쟁은 대형마트 MD들이 치르는 수많은 전투 중 하나일 뿐이다. 제일 큰 전투는 명절 때 벌어진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추석 전쟁’은 특히 고달프다. 올봄 냉해 때문이다. “최근 5년 중 과일 작황이 가장 나쁘다”는 말은 엄살이 아니다. 마트의 최전선 MD들은 비상체제에 돌입한 지 오래였다.

홈플러스 과일 담당 MD 김형훈(42) 과장은 4월부터 움직였다. 산지에서 직접 확인한 상황은 언론 보도보다 나빴다. 이대로는 추석 사과 물량을 댈 수 없었다. 기존 거래처에서 물량을 더 확보하거나 새로운 산지를 찾아야 했다. 김 과장은 후자에 주력했다. 기존 산지들은 냉해가 심하다는 소식에 이미 기대 가격이 높아져 있었다.

농협에서 새로운 산지를 추천받고 물건을 확인한 뒤 최종적으로 산지에 직접 가 물건을 검증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 배는 8곳에서 17곳으로, 사과도 8곳에서 11곳으로 주거래 산지를 늘렸다.

비슷한 소동은 롯데마트에서도 있었다. 배나무 역시 냉해로 꽃이 예년의 60% 정도밖에 피지 못했고, 그동안 거래했던 농장을 다녀 봐도 기형이거나 납작이 등 상품성 떨어지는 배가 많았다.

주산지인 전남 나주의 경우 상당수 배가 크기와 품질 미달로 정상적인 판매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명절 선물세트를 구성하려면 품질 좋은 ‘대품’이 있어야 했다. 기존 거래처에서 생산할 수 있는 양은 추석에 필요한 물량의 70%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대체 산지가 필요했다.

대체 산지는 가능하면 기존 주력 산지인 나주, 경북 상주와 수확일도 비슷해야 했다. 이곳보다 위도가 높으면 수확일이 늦어 추석 상품으로 내놓기 어렵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곳이 전북 전주와 경북 영천이었다. 그 중에서도 다른 유통업체와 거래하지 않는 지역 업체를 골랐다.

“여러 군데 복수거래하는 곳은 우리한테 집중을 못해줘요. 우리가 원하는 스펙대로, 장기적으로 재배해 줘야 하거든요. 항상 단독거래처 확보를 위해 움직이죠.” 롯데마트 청과 담당 MD 신경환 과장의 말이다.

물량은 노력으로 확보할 수 있지만 품질은 그렇지 않다. 사과는 아직 익지 않았다. 원하는 크기나 당도의 제품이 얼마나 출하되느냐에 올 추석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다.

“자연이 하는 일이에요. 계약으로 물량은 확보했지만 원하는 수준의 물건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이곳에서 안 되면 저곳에서, 저곳에서 안 나오면 또 다른 곳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죠.”(홈플러스 김 과장)

롯데마트 신 과장의 고민도 같다.

“우리가 구하려는 배의 품질 기준은 당도 10브릭스 이상이에요. 그 외에 정방형일 것 등 여러 조건이 있는데, 과연 이런 기준에 맞는 제품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을지가 문제예요.”

올해 추석 전쟁을 힘들게 하는 데엔 수산물도 빠지지 않는다. 홈플러스 수산물 담당 MD 김형탁(33) 대리는 “어황이 좋지 않아 프리미엄 상품 구하는 게 아주 힘들다”고 했다.

제수용품은 대부분 냉동 제품이다. 대형마트들은 이미 조기, 도미, 병어, 문어 등의 물량을 확보했다. 생선마다 제철에 미리 확보해 비축해둔다. 조기는 3∼4월에 사들여 냉동하고, 병어는 5∼6월에 사들이는 식이다. 비축 시즌에 얼마나 싸게, 많은 물량을 확보해두느냐가 중요하다.

롯데마트 여 대리는 “명절엔 모든 상품 가격이 올라간다. 수산물은 얼리지 않은 생물 수요가 많아져서 단가가 더 올라간다. 그때 물량을 확보하려고 달려들면 가격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곧 추석이다. 1년 동안 준비해온 결과가 드러난다. 누가, 얼마에, 얼마나 물량을 확보해뒀는지, 추석 때 매장에 붙는 가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가을 조기 시즌이에요. 만약 봄보다 많이 잡혀서 가을 조기 가격이 저렴해지는 상황에서 ‘봄에 충분히 사뒀으니까’하고 손놓고 있다가는 나중에 큰일 날 수 있어요. 경쟁 업체에서 가을 조기를 확보해 반값에 내놓으면 어떡합니까.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해요.”(여 대리)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