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장 앞둔 부산 해운대… 비키니·클럽·명품, 해운대는 이제 브랜드다
입력 2010-08-26 17:58
해운대는 ‘욕망의 바다’다. 식스팩 복근 남성과 비키니 아가씨가 주류인 피서객은 지난달 1일부터 개장 두 달간 1000만명을 넘었다. 파라솔 6000여개와 튜브 9000여개로 도배된 해수욕장은 여백이 없다. 백사장은 성수기에 하루 평균 8t의 쓰레기를 토해낸다.
피서객들은 이곳에서 ‘세련됨’을 구매한다. 서울의 강남을 이식한 듯 고급스런 고층 건물 사이로 외제차가 다니고, 세계 최대 백화점에서 명품이 소비된다. 피서지에서 감내해야 할 모기 따위의 불편함과 느림은 해운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밤낮 구분 없이 쉬지 않고 바빴던 해수욕장도 31일 폐장을 앞두고 있다.
26일까지 누적 피서객 1013만3000명을 기록한 해수욕장은 여름 내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2003년 피서객 1125만9000명이 다녀간 뒤로 매년 1000만명을 돌파하고 있다. 이는 누적 관광객 숫자여서 실제로 국민 5명 중 1명이 온 것은 아니다. 해변에서 직선거리 50m인 수영 가능 구역과 백사장, 그리고 인접 도로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피서객 집계는 하루 5회 실시된다. 다섯 차례 집계된 숫자를 합산해 하루 피서객을 추산하기 때문에 온종일 해수욕장에 있었던 관광객은 최대 5회까지 중복 집계된다. 따라서 실제 관광객은 1000만명이 못 될 수 있다.
셈법의 오차는 있지만 해운대의 브랜드 가치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매년 초고층 빌딩이 생겨나는 해운대는 ‘한국의 두바이’라는 별명마저 얻었다. 부산발전연구원 우석봉 박사는 “예전에는 자연 경관을 즐기러 휴가지에 갔지만 요즘 관광객들은 이국적 테라스 문화와 상류층 동네의 모습조차 영화 보듯 소비하기 때문에 해운대가 인기를 끄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해운대는 부산에서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대표적 동네다. 부산 부자는 해운대구 안에서만 이사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1980년대 후반 해운대 중동 달맞이길은 정원이 넓게 딸린 고급 빌라촌과 레스토랑이 형성된 이국적인 부촌이었다. 부촌은 90년대 후반 들어 해운대 좌동 신시가지로, 2000년대 후반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이 밀집한 우동 센텀시티와 마린시티로 옮겨 갔다. 2007년부터는 3.3㎡당 4500만원 이상을 기록해 국내 최고 분양가를 경신한 초고층 아파트도 잇따라 건설됐다.
중산층과 관광객, 외국인 밀집 지역인 해운대는 소비형 관광지이기도 하다. 지난해 세계 최대 백화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연면적 29만3909㎡)은 울산과 거제도,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쇼핑객이 오는 곳이다. 신세계백화점 홍보팀 관계자는 “지난해 3월 개장 이후 1년 만에 매출액이 56.6% 성장한 센텀시티점은 명품이 전체 매출의 29%를 차지해 전국 8곳 신세계 매장에서 두 번째로 명품 소비가 많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비키니 여성, 복근 남성, 노숙자까지
해운대의 또 다른 변화는 ‘젊음’이다. 해운대 해수욕장은 10년 전만 해도 가족 단위 관광객이 주를 이뤘다. 지금은 ‘가족 관광객=광안리’ ‘20∼30대 피서객=해운대’란 공식이 자리 잡았다.
해운대는 최신 해변 패션의 ‘캣워크(cat walk·패션쇼 무대)’이기도 하다. 어깨와 가슴 윗부분이 드러나고 이국적 무늬가 새겨진 튜브탑 원피스는 이곳 여성 관광객에겐 교복과 같다. 해운대 ‘여름경찰서’의 한 경찰관은 “해운대에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성이 거의 없고 대부분 비키니를 입는다. 남성들도 몸을 만들어 오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으면 티셔츠로 상반신을 가린다”고 말했다. 해운대의 ‘보이지 않는 손’이 끊임없이 ‘물 좋은’ 해수욕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2∼3년 전부터 번성한 클럽 문화도 해운대의 ‘노화’를 방지한다. 주변 호텔 부근 클럽들은 고급스러움에다 서울 홍익대 거리의 ‘DJ 문화’를 더했다. 휴일인 22일 파라다이스호텔의 클럽 ‘엘룬’에 다녀간 여성 윤모(27·서울 강남구 신사동)씨는 “8월 초에는 비키니 입은 채로 들어가 춤추는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며 “찾아오는 손님도 멋있고 클럽 수준이 높아 다시 오고 싶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젊고, 돈 많은 이들만 해운대를 찾는 것은 아니다. 전국 각지의 노숙자도 이곳에서 ‘피서’를 한다. 여름경찰서 장재일 경위는 “전라도, 경상도, 수도권 등 다양한 말씨의 노숙인들이 백사장 뒤편 송림공원에서 여름을 보내고 성수기가 끝나면 근거지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자연이 주는 햇볕으로 공짜 선탠을 즐기며 백사장에서 한데 어울려 놀던 관광객들도 밤이 되면 소득 수준에 따라 ‘노는 물’이 달라진다. 지갑이 두둑한 이들은 인근 호텔과 클럽에 들어가 야경과 밤 문화를 즐긴다.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사람들은 백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공짜 숙박을 하거나 ‘즉석 만남’을 가진다. 백사장의 즉석 만남과 노숙도 인근 고급호텔 투숙객에겐 해운대의 야경이 된다.
모래 속 유리조각 찾아라
사람이 많다보니 쓰레기도 엄청나다. 해운대 해수욕장은 26일까지 쓰레기 144t을 배출했다. 하루 최대 280명에 달하는 환경미화원과 자원봉사자, 모래 속 30㎝까지 뒤지며 유리조각을 찾아내는 ‘비치클리너’(1억5000만원 상당) 청소차량이 투입돼야 해수욕장은 매일 깨끗해진다. 7, 8월 청소비만 2억원이 넘는다.
22일 새벽 4시30분에도 쓰레기가 가득했다. 미화원 30여명이 백사장 정비에 나섰다. 성수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모래사장에서 자는 사람과 동그랗게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미화원이 자루 하나를 쓰레기로 채우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미화원 김모(58·여)씨는 “성수기엔 새벽에도 발 디딜 곳 없이 백사장이 붐비는 데다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사람이 많아 깨워가며 청소했다”고 토로했다.
여름철 해운대 해수욕장은 하나의 작은 지역사회다. 부산은행과 국민은행 등은 입·출금과 환전 업무를 담당하는 해변은행을 개설하고 여름경찰서, 해운대여름해양경찰구조대, 119구조대, 해운대구 봉사실도 해변으로 나온다. 해운대구에는 특이한 부서도 있다. 지난 1일 국내 최초로 개설된 ‘세계시민사회과’는 자원봉사 동아리 지원, 글로벌 매너와 인문학 강연, 시민단체 지원을 담당한다. 지난해 구민 43만명 중 6만5000명이 자원봉사에 참여해 최우수 자원봉사 자치단체로 선정된 해운대구는 구민 인적자원을 개발해 명품 관광도시를 만들려 한다.
배우 명계남, 감독 쉬커(徐克)도 찾아
해운대에는 크고 작은 문화 자원도 있다. 22일 새벽 2시부터 6시까지 탱고 동호회원 50여명이 모여 해변에서 춤을 췄다. 통기타 하나 메고 노래 부르는 청년 주위에도 사람이 하나둘 모이더니 즉석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백사장에는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거리화가 10여명이 오후 7시30분부터 자리를 잡는다. 배우 명계남, 홍콩 영화 ‘영웅본색’을 연출한 쉬커 감독도 이곳 화가에게 스케치를 부탁했다. 잡상인으로 분류됐던 거리 미술가들이 구청 단속을 받지 않게 된 것은 불과 10년 남짓이다.
대학 시절 해운대 바다에 매료돼 대구의 작업실을 버리고 여기서 20년간 인물화를 그렸다는 현상훈(43)씨. 그는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실직한 중년들이 찾아와 하소연하며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해운대는 애환이 담긴 작업장”이라고 했다.
떠들썩한 맛은 없지만 천천히 걸으며 사색할 수 있는 문화공간은 해운대 달맞이길이다. 소설 ‘여명의 눈동자’ 김성종(69) 작가가 건립한 추리소설 전문 도서관 ‘추리문학관’과 20여개 갤러리가 모여 있다. 달맞이길 일대에서 여름마다 개최되는 ‘철학축제’도 마니아 사이에선 인기다. 지난 7, 8일 열린 철학축제에선 클래식 음악회, 미술 장터, 황석영 작가의 인문학 강연이 주목을 받았다.
부산=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