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호경] ‘國恥 100년’ 기획을 마치고

입력 2010-08-25 21:33


지난해 10월 30일 오전 일제 강점기 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들과 시민단체 관계자 10여명이 서울 대치3동 퍼시픽타워 빌딩 앞에 모였다. 쌀쌀한 날씨에 노구를 이끌고 나온 80대 할머니와 그 지원자들은 이 빌딩에 입주해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한국사무소를 대상으로 ‘금요 시위’를 개최했다. 벌써 37회째 한 주도 빠짐없이 이어온 항의의 외침이었다.

“64년이라는 엄청난 세월 동안 단 한번도 사죄나 보상을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 분하고 가슴이 찢어진다.”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역사 뒤에 숨지 말고 징용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도의적 책임을 다하라!”

강남의 풍요를 상징하는 듯한 고층빌딩과 그 속에 형성된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이질적인 침입자처럼 보였다. 점심시간이 돼 보도로 한가득 쏟아져 나온 화이트칼라 회사원들은 이들의 행색과 구호에 잠깐 의아한 눈길을 보내다 곧 총총히 스쳐 지나갔다. 1분 이상 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 일행은 마침내 빌딩 안으로 진입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에 내렸다. 그리고 미쓰비시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 어떤 대답도 없었고 문도 열리지 않았다. 사실 이 사무실 직원들은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사업을 대행하거나 보조할 뿐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책임도, 아무 권한도, 심지어 아무 지식도 없었다. 할머니 일행도 그 사실을 잘 안다. 다만 자신들의 제스처가 미쓰비시 측에 전달되기 바랐을 뿐이다. 할머니 일행은 하릴없이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 메아리 없는 세상 속으로 내려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기자에게는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 의문의 핵심은 결국 두 가지로 모아졌다. 세계적 대기업인 미쓰비시는 과연 일제 시기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리고 명백한 피해자로 보이는 이 할머니들에게 왜 사과하고 보상하지 않는가?

그렇게 해서 시작된 본보의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전범기업을 추적한다’ 시리즈가 이달 11일 마침표를 찍었다. 3월 1일부터 매주 2개면씩 할애해 연재를 이어갔으니 나름대로 장정(長征)이었다. 광복이 이뤄진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일본 대기업들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자체가 공론화된 적이 없던 한국 사회에서 언론이 분명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다 지난 과거사를 지금 꺼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주변의 냉소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 관심과 격려가 훨씬 많았다. 국내와 일본, 사할린 등지에서 만난 징용 피해자들은 취재팀을 늘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취재팀은 때로 난감한 경우를 겪기도 했다. 충남 아산에 사는 88세의 정준모 할아버지는 “한여름에 시골집까지 찾아오느라 너무 고생했다”며 안방에서 주섬주섬 3만원을 꺼내 기자에게 차비하라고 한사코 쥐어주셨다. 밭이랑처럼 주름이 깊게 파인 할아버지의 거친 손을 붙들고 기자는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게 오히려 도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팀에서 함께 일한 우성규 기자는 남양군도에 끌려갔던 이도재 할아버지를 충남 청양에서 만나고 회사에 돌아온 뒤 곧 친필 편지를 받았다. “고령에 병약한 탓으로 정신이 흐려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고, 또 중언부언이 된 점 유감으로 생각하오며…”하는 말씀과 함께 우편환 10만원이 동봉돼 있었다. 90세 노인이 힘들게 썼을 미안하고 고맙다는 글자 하나하나가 취재팀 가슴에 깊이 들어왔다. 그 외 취재 과정에서 순간순간 울컥하고 눈시울을 붉혔던 일들을 이 칼럼에 다 담을 수 없다.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한 피해자들의 법적·정신적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피해자가 기억하고 가해자도 기억해야 진정한 화해가 성취되고 미래도 흔쾌히 열린다. 망각은 역사의 교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린다.

김호경 특집기획부 차장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