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위엔 종가’ 집들도 계급이 있었네… 세계문화유산 등재 경주양동마을

입력 2010-08-25 17:29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영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로 꼽히는 경주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가 550년 동안 전통을 이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여강 이씨로 처음 양동에 거주했던 인물은 고려 말의 이광호. 그의 손자사위인 류복하가 이 마을에 장가들어 정착했다. 그 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월성 손씨 손소가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해 양동마을에 눌러 살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이어 이광호의 5대 종손인 이번이 손소의 차녀와 결혼해 동방5현으로 불리는 회재 이언적을 배출하면서 이씨와 손씨가 더불어 살게 되었다. 양동마을을 외손마을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포항 방면으로 16㎞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동마을은 하회마을과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하회마을이 물돌이동인 강마을인데 비해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뻗어 내린 네 줄기의 산등성이와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룬 산마을이다.

고건축의 전시장으로 불리는 양동마을이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의 전란을 피해 옛 모습을 보존한 것은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지형 때문이다. 동해남부선 철로를 건너 도저히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호젓한 산길을 달리면 임시주차장으로 쓰이는 양동초등학교 뒤로 양동마을이 펼쳐진다. 하지만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양동마을은 전체의 25% 정도. 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입구에서 가파른 산등성이를 올라 관가정 누마루에 오르면 형산강과 드넓은 안강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풍수사상에 입각해 배치한 마을이라는 사실은 높은 곳에 올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하회마을이 양반과 상민이 처마를 맞대고 한데 어울려 살았다면 양동마을은 종가는 높은 곳에 살고 상민은 낮은 곳에 집을 짓는 등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양동마을은 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 등 4개의 골짜기와 물봉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渴求德)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당연히 양동마을 답사도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중심으로 6개 코스로 나눠진다.

첫 번째 코스는 관가정에서 향단과 정충비각을 거쳐 수운정에 이르는 향단코스. 500년 수령의 벼락맞은 은행나무를 지나 산등성이에 오르면 고색창연한 관가정이 맞는다. 보물 제442호인 관가정은 조선 중종 때 명신인 우재 손중돈이 손소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 관가정(觀稼亭)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 보물 제412호인 향단은 이언적 선생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던 1543년에 지은 집으로 본래 99칸이었으나 지금은 56칸으로 줄어들었다.

두 번째는 심수정, 강학당, 이향정, 안락정으로 이어지는 하촌 코스. 고목에 둘러싸인 심수정은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이언적의 아우 이언괄을 추모해 건립한 정자로 양동마을에는 모두 10개의 정자가 전해온다.

하촌에서 무첨당, 영귀정, 설천정사, 대성헌, 물봉고개를 거쳐 물봉동산에 이르는 물봉골코스의 정수는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無?堂). 무첨당은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으로 대원군이 썼다는 ‘좌해금서’ 편액이 걸려있다. 회재 이언적이 젊은 시절에 학문을 수학했던 영귀정, 안강평야를 캔버스 삼은 물봉고개 아래의 초가집이 정겹다.

이밖에도 월성 손씨의 종가집으로 양동마을의 입향조로 불리는 손소가 지은 서백당은 내곡코스의 중심. 서백당(書百堂)은 종부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쓴다는 뜻으로 근래에 굳어진 당호. 재미있는 사실은 서백당에서 세 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예언이다. 손소의 둘째 아들 손중돈과 외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난 이언적이 주인공이고, 한 명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