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용 칼럼] ‘逆주행 정치’의 교훈

입력 2010-08-24 17:45


“국론분열 부른 세종시 논란, 청문회 위장전입 이중잣대는 역사의 퇴보다”

11개월 만의 MB-박근혜 회동을 다룬 23일자 신문들의 제목은 대부분 ‘정권 재창출 위해 함께 노력’이었다. 합의내용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도 있었지만 제목으로 뽑히지 않았다. ‘정권 재창출’보다는 ‘서민을 위해 함께 노력’을 뽑았다면 더 의미있는 회동이 되지 않았을까.

정치권과 언론은 왜 정권 재창출에 이토록 집착을 하는가?

한국의 대통령은 당선되는 순간 차기 정권 재창출이라는 과제를 안는다.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이념의 지속적 실현을 위해 재집권은 중요하다. 또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만 2만여개라니 집권은 정치세력에 있어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게임이다. 재집권에 실패할 경우 역대 정권에서 그랬던 것처럼 혹시 독직 혐의로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다.

이런 속성의 정권 재창출이 정치의 최우선 가치가 돼야 하는지 의문이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경제 상황 등에 따라 좌·우파 정권의 교체가 다반사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정권 재창출에 목을 매지는 않는다. 정권 재창출은 정치세력 ‘그들만의 리그’일 뿐 국민은 선거 때가 아니면 별로 관심도 없다.

우리나라도 남북관계를 보는 시각을 제외하면 보수, 진보 진영의 이념에 큰 차이는 사라졌다. 국민들 분포도 보수-진보-중도가 ‘30-30-40’이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친서민 중도 실용주의’로 바뀐 것도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희석시켰다.

한국 정치의 병폐는 정권이 교체되면 전 정부의 주요 사업들이 무시되는 점이다. 문제가 있으면 보완하고 개선하면 될 걸 180도로 역주행(逆走行)을 시도한다. 세종시가 말하듯 결과는 엄청난 국론분열이었다. 국민적 합의와 절차를 모두 거친 원안을 ‘행정 비효율’을 이유로 수정하려다 결국 민심 이반과 선거 참패를 불렀다. 경제와 교육 분야 최고급 인재라는 정운찬 전 총리가 1년이란 세월 동안 제대로 된 정책 한번 펴보지 못하고 ‘세종시 총리’로 매몰된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현재 진행 중인 인사 청문회도 역주행이 심각하다. DJ정권 시절 국무총리에 내정됐던 장상, 장대환은 위장전입 논란으로 낙마했다. 그 이후 위장전입은 청문회 결격사유라는 불문율이 됐지만, 전 정권 때 완화되더니 현 정부 들어서는 완전히 깨졌다. 최근 10년간 위장전입으로 처벌받은 국민이 5000명이 넘는데도 청와대는 ‘부동산 투기용 아닌 자녀 교육용 위장전입은 봐 준다’는 내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고위공직자의 도덕불감증만 키웠다.

전에는 장관직 등을 제의받으면 10명 중 7∼8명은 청문회 통과가 자신 없어 고사했는데 이젠 그런 염치마저 사라졌다. 누구보다 법을 잘 지켜야 할 경찰청장, 국세청장, 대법관 후보자뿐 아니라 장관 후보자 대부분이 위장전입자인데다 온통 하자 투성이다. 이번 청문회에 국민은 분노하고 허탈했다. 대통령이 뒤늦게 “더 엄격한 인사검증 기준을 만들라”고 했지만 사후약방문이다.

청문회 검증 잣대의 역주행은 역사에 대한 배신이고 퇴보다. 최소한 장상 청문회 이후 위장전입자는 공직을 꿈도 못꾸게 해야 했다.

최근 발표된 ‘행복한 나라’ 순위에서 한국은 155개국 중 56위, ‘이민가고 싶은 나라’ 순위는 50위에 그쳤다. 세계 15위 경제, 가장 역동적인 국민성이라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다.

지난주 내한 강연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한국에서 정치 불신이 높은 이유를 “정치가 부(富)의 증대 등 경제적인 부분에만 치중해 정의와 같은 문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늘로 이 대통령은 임기의 반환점을 맞았다. ‘친서민 중도실용’에 이어 ‘공정한 사회’를 표방했다. 남은 임기 동안 심각한 빈부격차 해소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지난 정부의 유산도 계승할 것은 계승하는 것이 국정의 효율과 정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국민을 진정 두려워하면 정권 재창출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이형용 수석 논설위원 hy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