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대영] 공직자의 도덕적 기준
입력 2010-08-23 18:53
“관직을 꿈꾸는 자는 최소한 ‘銀의 법칙’으로 약자에게 따뜻한 손 내밀 수 있어야”
생긴 것이 다르듯 저마다 윤리의식과 도덕관념도 다르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들은 명백한 금언과 율법으로 인간 만사를 다스렸다.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인류공동체의 행동방식과 율법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가 예수 그리스도가 산상수훈 중에 가르친 ‘황금률(黃金律)’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는 “오른쪽 뺨을 때린 사람에게 왼쪽 뺨도 내밀어라”고 가르쳤다. 누군가가 자기의 뺨을 때린다면 그건 필히 곡절이 있을 것이니, 그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보라는 것이다. 예수의 황금률은 여간한 성인이 아니라면 실천할 수 없다.
도덕률의 기준을 한 단계 낮추자. 그러면 ‘은(銀)의 법칙’이 된다. 이것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지 않은 행위를 남에게 행하지 마라”는 것이다.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주장한 간디 선생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행동법칙이 그것이다. 야만적이고 부당한 법과 제도와 폭력 앞에서도 그와 똑같이 야만적으로 행동하지 말기를 주장하며 끝내 비폭력으로 사회 변혁을 이끌어 냈다. 역시 평범한 사람은 행할 수 없다. 어지간한 사람은 복장 터질 일이다.
한 단계 더 낮추자. ‘동(銅)의 법칙’이다. 팔조법금이나 함무라비 법전에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 원리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보답 원리가 합쳐진 행동방식이다. 공자도 “선은 선으로 갚되, 악은 정의로 갚아주어라”고 말했다. 각 나라의 법과 제도는 대개가 동의 법칙으로 만들어졌다. 이것만 잘 지켜도 멋진 사람이다. 그러나 스스로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동의 법칙을 따르기도 어렵지 않은가. 그래서 훌륭하신 분들도 청문회에서 죄다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
동의 법칙보다 한 단계 더 낮추면 이른바 ‘철(鐵)의 법칙’이 된다. 이것은 “남에게 당하기 전에 네가 먼저 때려버려라”는 것으로, 권력이든 금력이든 주먹이든 힘깨나 쓰는 사람들 가운데 특히 돼먹지 못한 부류의 인간들의 행동방식이다. 유럽인의 아프리카 노예사냥, 19세기 후반의 식민 제국주의, 20세기의 양차대전을 일으킨 파쇼정권, 그리고 현대의 모든 독재정권들의 행동법칙이다. 이것은 강자(强者) 우선의 법칙으로 현대에도 이와 같은 철의 법칙은 도처에 난무한다.
마지막으로 철의 법칙보다도 못한 ‘돌(石)의 법칙’이 있다. 이것은 “강자에게는 무조건 아부하고 약자(弱者)는 철저하게 짓밟아 버려라”는 것으로,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들의 세계에 두루 적용되는 법칙이다. 따라서 평범한 인간이 돌의 법칙을 사용한다면 그야말로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의 법칙을 고루 사용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이 황금률로 타인을 대한다. 그러나 게임이론에서도 나타나듯이 황금률을 적용하여 덕을 베푸는 ‘무조건 협력’은 늘 이용당하기 때문에 백전백패이고, 보복하지 않는 은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며, 결국 많은 사람들이 동의 법칙으로 살아간다. 필요에 따라서는 오로지 생존하기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돌의 법칙도 쓸 때가 있다. 일단은 목숨은 부지해야 하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자신에게는 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보다 관대한 도덕관념과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법만은 지키고 산다는 동의 법칙이라도 준수해야 한다. 내각(內閣) 청문회에서 후보자들에게 보다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 권력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건강이든 그 ‘무엇’을 남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그에 걸맞은 도덕관념과 행동양식을 갖춰야 한다. 스스로 황금률을 실천할 수 있는 자제력과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은의 법칙과 양심은 갖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 삶이 고단하고 춥고 어려운 분들의 눈물과 설움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이대영(한국문화예술 교육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