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층 이유있는 인문학 열풍… 잊고 살아온 나를 찾는다
입력 2010-08-23 18:16
지난 18일 오후 3시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다산경제관 강의실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로 가득 찼다. 중절모를 쓴 60대 노(老)신사, 손을 꼭 잡고 온 70대 부부, 돋보기를 쓰고 필기에 열중하는 80대 여성. 이들은 모두 ‘성균관대학교와 함께 떠나는 인문학 여행’ 강좌를 듣기 위해 모인 지역주민들이다.
첫 수업은 가톨릭대학교 박종한 교수의 ‘상상, 코끼리를 통해 보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 동남아의 이질적인 동물로 여겼던 코끼리가 중국문화권 내 친근한 동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기관 은퇴 후 아내와 함께 강좌에 참여하게 됐다는 임동혁(77)씨는 5년 전부터 경희대와 연세대 등에서 개설됐던 인문학 강좌에 한 번도 강의를 빼먹지 않은 ‘모범학생’. 임씨는 “은퇴한 뒤 집에만 있기 적적해서 신청했지만 강좌 하나하나를 들을 때마다 점점 더 호기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연영숙(65)씨는 “재테크나 실용위주의 학문보다 배우는 데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하지만 인생에 풍요로움을 주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라고 예찬했다.
최근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인문학 강좌 열풍이 불고 있다. 구청 등이 대학과 연계해 개설한 인문학 강좌는 매달 자리가 꽉 찬다. 서초구가 서울교대와 함께 운영 중인 ‘동아시아의 사상과 배려’, 송파구와 건국대가 운영 중인 ‘대하소설로 배우는 인문학’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5월부터 강의를 시작한 강남구의 인문학 강좌 역시 지난 한 해 수강생만 2000명에 이를 정도다.
저소득층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도 운영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중랑구가 삶의 의지를 일깨우기 위해 개설한 ‘희망의 인문학’ 강좌엔 기초생활수급자와 노숙인 등 100여명이 참가했고, 노숙자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운영 중인 성프란시스 인문교양 코스에도 매년 참가하는 노숙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인문학 열풍이 각종 비윤리적인 사건·사고들이 만연한 시대에 인간성 회복과 기초 소양을 쌓으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인문학 강좌가 메마르고 각박해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마음이 풍요로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갈등해소의 장(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랑구 인문학 강좌에 참여했던 기초생활수급자 김모(53)씨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중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명심하라’라는 글귀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시대적 고충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일 뿐 어떻게 현명하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란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중랑구청 관계자는 “인문학은 저소득층과 노숙인들에게도 자존감 회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삶의 의지를 심어주고 정신적 빈곤탈피를 돕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김재혁 교수는 “인문학은 100억을 버는 방법이 아닌, 돈의 가치를 알고 제대로 쓰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학문”이라며 “최근의 인문학 열풍은 영어중심, 경제학 등 실용학문 중심인 삶의 풍토에 대한 반성”이라고 강조했다.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 임정혁 대학생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