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성기철] ‘서재필 교육관’ 건립에 예산지원을
입력 2010-08-23 17:36
개화사상가, 혁명가,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사업가, 의학박사, 군인…. 서재필(1864∼1951)에게 붙는 수식어는 참 많다. 험난한 시대에 엄청 치열하게 살았다는 증거다. 19∼20세기 우리나라가 배출한 최고 지성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미국 필라델피아 인근 미디어시(市)에 가면 서재필이 25년간 거주하다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3층짜리 빨간 벽돌집을 만날 수 있다. 미국에 있는 ‘서재필 기념재단’이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 집 옆에 교육관을 짓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이민 2, 3세를 위한 역사 체험장으로 꾸밀 계획이란다. 건축비용 300만 달러(약 35억원) 중 150만 달러는 미국 교민들의 성금으로 마련하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독립 위해 일생 바친 선각자
서재필은 조국의 개혁과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각자다. 18세 되던 해 과거에 합격한 그는 공직에 연연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도야마학교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고종을 알현해 사관학교 설립을 진언했다. 열강이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역량 있는 군인을 많이 양성해야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20세 때인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기나긴 망명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서재필은 곧바로 조지워싱턴대 의과대학에 들어가 의사가 됐다.
갑신정변 11년 만에 대사면을 받아 중추원 고문관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서재필은 배재학당 강사로 이승만 주시경 같은 걸출한 후학을 길렀다. 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독립문을 세우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과의 갈등으로 고문관직을 박탈당해 3년 만에 또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필라델피아에 자리 잡은 그는 인쇄업을 해 꽤 많은 돈을 벌었으며, 독립자금으로 거액을 내놓기도 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은 그를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조미수호조약 준수와 상하이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가 하면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해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를 적극 돕는 한편, 언젠가 ‘신대한(新大韓)’이 수립될 것으로 보고 그 지향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광복 후 귀국해서는 미 군정청 특별의정관으로 활동했다. 1948년 반 이승만 세력을 중심으로 ‘서재필 대통령 추대 운동’이 벌어졌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조용히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한국전쟁 중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서재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갑신정변이 너무 성급했다는 지적을 받는가 하면 우리말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을 고깝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난 장택상(국무총리 역임)은 회고록에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그 누구 못지않게 투쟁한 분이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말이 서툴러 첫 인상은 외국인을 대하는 것 같아 서먹서먹했다”고 묘사했다. 광복 후 서울중앙방송 라디오에 출연, 연설할 때도 손금성의 통역을 필요로 했다.
민주주의 심는데 큰 역할
하지만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점을 그다지 문제 삼지 않는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며, 되찾은 나라에 자유 민주주의를 심는데 큰 역할을 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우리말이 좀 서툴렀다고 수많은 업적이 폄하되어서는 안 되겠다. 90평생을 살면서 서재필만큼 흠잡을 데 없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서재필 기념재단이 요청한 17억5000만원을 부처 차원에서 내년도 예산으로 책정해 놨으나 국회가 어떻게 처리할지는 미지수다. 별 문제 없다면 여야가 교육관 건립 사업에 협조해 줬으면 좋겠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