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아침] 역사적 거래
입력 2010-08-23 17:42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을 자주 만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1∼2)
우선 시험이라는 단어부터가 수상쩍다. 성경에 나오는 시험은 테스트일 수도 있고 연단의 뜻일 수도 있으나 이 경우에 사용된 ‘닛싸’는 유혹의 의미가 강하다. 사람을 잡아 불에 태우는 번제 자체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레 18:21)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뜻밖의 지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혹시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잘못 말씀하셨는지 질문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그런 일을 시킨 것일까? 문제의 근원은 다시 아담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7)
그러나 사람은 그 위험한 자유 때문에 결국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될 것을 하나님이 예감하셨다. 그것을 먹고 죽게 될 사람을 구원하려면 하나님 자신이 아픔을 당해야 할 것도 알고 계셨다. 이미 그때부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실 일이 작정된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떠난 사람에게 공평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원칙을 깨고 명분 없이 독생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을 맞바꾸는 공정한 거래를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 일로 자신의 독자를 바칠 것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순종의 훈련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50년을 동행하신 후 극비리에 역사적 거래를 제의하셨다. 하나님은 염치불고하고 네 아들을 내게 달라고 하신 것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거래를 거부했다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칼을 들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 22:11)
너무 감격하여 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른 하나님의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6∼17)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작가 김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