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뉴고려병원 이운집 원목의 열정적 노후… 89세 ‘아름다운 실버’
입력 2010-08-22 19:04
‘노년’이라 하면 한 걸음 물러서 뒷짐 지고 지켜보는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 뉴고려병원 원목실에 가면 열정적으로 노후를 보내는 ‘노(老) 사역자’를 만날 수 있다. 22일 오전 9시 병원 10층 강당. 환자와 가족 30여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모였다. 머리가 희끗한 노 목회자가 마이크도 없는 강당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씀을 선포했다.
“가시 같은 삶을 살던 우리가 몸이 아프니, 배를 고파보니 약함을 알게 되고 겸손해졌습니다. 그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고, 나아가 그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약함을 모두 고하십시오.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져주실 것입니다.” 노 목회자는 예배가 끝난 뒤 일일이 환우의 머리에 손을 얹고 뜨겁게 기도했다.
10년 전 원목실을 개척한 이운집 목사의 이야기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에서 고 강원용 목사와 함께 수학한 이 목사는 올해 89세다. 은퇴 후 ‘쉬엄쉬엄’ 활동하던 이 목사는 79세에 원목으로 다시 ‘유턴’했다. 이후 노 목사는 더 바빠졌다. 주일예배 설교는 물론 평일 주 2회 300여명의 입원 환자들을 심방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칼럼을 쓰고, 그 주의 말씀을 요약·정리해 주보도 제작했다. 또 인쇄돼 나온 330장 분량의 주보를 800㏄ 경차에 싣고 직접 운전해 원목실로 가져와 교정을 보는 것도 그의 일이다. 10년 넘게 한결같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먹고 사니까 눈과 정신이 맑아지고 그래서 건강한 것 같아. 사실 나이가 드니까 심방 다니는 건 좀 힘들어. 그저 바람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이렇게 주의 일 하다가 갔으면 해.”
평생 이 목사 곁을 지켜온 동반자가 예배 때 피아노 반주로 헌신하는 아내 유은준(85) 사모다. 성악 전공자인 유 사모는 반주뿐 아니라 찬양도 인도한다. 평일엔 집 근처 노인복지관에서 영어와 일어 강사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80대 노인이 60대 후배 노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벌써 2년 됐다.
원목실을 섬기는 또 다른 동역자가 있다. 조카인 제약회사 CEO 출신 이천광(70) 목사와 한정이(65) 전도사 부부.
“큰아들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신증후군 사구체신염 등으로 8년 정도를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아내와 청계산 기도원에 올라 금식하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어가던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천광 목사는 그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는 말씀을 소명으로 받았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호스피스 봉사를 하며 노후를 보낼 것도 다짐했다. 그는 회사를 운영하며 신학도 공부했다. 2008년 12월 회사를 퇴직하고 이듬해 1월 독립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목사는 “작은 아버지(이운집 목사)께서 원목실을 개척하고 그 연세에도 열정적으로 환자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았다”며 “이제는 조금 쉬셔도 될 것 같아 내가 그 사역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90세의 노 목회자가 개척한 원목실은 70세의 조카가 지원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외국인 근로자 환자들을 위해 영어성경을 준비했고, 퇴원 환자들에겐 염학섭 목사의 수상집 ‘은총의 회고’를 선물했다. 새로 입원하는 환자들에겐 시편과 잠언 말씀을 담은 성경을 선물했다. 이천광 목사는 병원 인근 교회들을 찾아가 후원도 부탁했다. 김포순복음교회 행복한교회 사랑하는교회 등에서 매주일 찬양봉사와 간식을 제공하고 있다.
내년이면 졸수(卒壽)가 되는 이운집 목사는 언제쯤 ‘은퇴’를 생각할까. “3년 전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 60세 여 환자를 잊을 수 없어. 내 딸 같았거든. 가족도 없이 홀로 아픔을 이겨내고 있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 급하게 나를 찾았어. 너무 아프니까 진통제를 놓아 달라고 애원하더군. 욥기를 읽어줬지. 그게 환자에겐 진통제였어. 하늘나라 갈 땐 눈물 없이 떠났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환자들을 만나라고 나에게 건강한 두 다리를 주신거야. 그게 내 일인데, 나이 제한이 어디 있어? 크리스천이라면 봉사해야 해. 그렇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거야.”
CEO에서 원목으로 새 인생을 사는 이천광 목사. 그는 서울 대치동에서 김포까지 출퇴근하는 게 힘들다며 살고 있는 대치동 집을 내놓았다. 병원 근처로 옮겨 사역에 올인하기 위해서다.
노년은 결코 일선에서 물러나 이선에서 바라보며 사는 게 아니다.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오히려 도전할 수 있는 행복한 시기다. 두 목회자는 “노년의 삶이 곧 설렘이요, 즐거움”이라고 정의 내렸다.
김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