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초대석] 문준경순교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 이재완 목사
입력 2010-08-22 18:07
“섬 선교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기념관을 짓는 데 남은 목회 열정을 쏟겠습니다.”
지난 주말 시공업체 선정을 위해 서울에 온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이재완(69·부산 영도성결교회 목사) 위원장은 올 여름에도 휴가를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8년 11월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장을 맡고 나서 언제나 그랬다.
문준경 전도사는 한국교회 첫 여성 순교자다. 1891년 신안군 암태면에서 태어나 1950년 10월 5일 새벽 전남 신안 증도 증동리 갯벌에서 좌익들에 의해 순교했다.
이 목사는 이런 문 전도사를 기리는 사업에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 틈만 나면 부산과 증도를 오가며 초석을 다져 나가고 있다.
이 목사는 오늘날 증도가 인구 2000여명인데, 90%가 크리스천이며 술집이 없는 깨끗한 섬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무속인들이 목숨을 걸고 선교를 방해했지만 문 전도사는 흔들리지 않았어요. 주민들이 감동할 때까지 참고 묵묵히 목민목회를 실천했지요. 순교 1년 뒤, 장례식엔 3000명이 운집했을 정도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모두 문 선생이라 부르며 추앙했지요.”
문 전도사의 순교 이후 증도는 ‘천국의 섬’이 됐다. 요즘 증도가 슬로시티로 각광 받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더구나 이 섬은 김준곤 이봉성 이만신 이인재 안승갑 박훈용 박춘석 김신배 정태기 목사 등 한국 기독교의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기념관이 건립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증도 주민은 대환영이다. 증도 10개 교회 세례교인들은 앞장서 1인당 5만원씩을 내겠다고 나섰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교단을 중심으로 시작된 모금액은 목표액의 절반을 넘겨 4억5000만원이 모였다. 총회에선 24억원을 지원한다.
순교기념사업회는 오는 27일 오후 1시 증도 건립현장에서 기공예배를 드린다. 이날 예배에는 기성 원팔연 총회장과 건립추진위원, 전국 지방회장, 평신도 단체와 기관 대표들이 참여한다.
이에 따라 내년 5월이면 순교한 갯벌이 내려다보이는 증동리교회 옆 언덕에 기념관이 완공된다. 2409㎡(730여평) 규모에 숙소동 1089㎡(330평)도 들어선다. 기념관 1층에는 문 전도사의 대리석 무덤이 자리한다. 또 무덤 옆에는 순교 당시 모습을 밀랍으로 복원하고 문 전도사가 쓰던 가방과 성경 등을 전시한다.
이 목사는 기념관이 완공되면 암태도에 있는 문 전도사의 생가를 복원할 계획이다. “한 알의 썩은 밀알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는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었어요. 그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되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진한 신앙의 향기를 뿜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처음에 위원장 자리를 고사했었다. 목회 지역도 부산이어서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분이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자신을 ‘3불(不) 목사’라며 자격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많이 받았지만 성도를 잘 돌보지 못한 ‘불성실, 불충, 부족한 목회자’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목사의 이러한 겸손의 리더십을 좋아했다. “다툼과 분쟁이 없이 총회장을 지내신 이 목사님이 하셔야 합니다.” 이구동성으로 문 전도사의 이름을 빛낼 적임자로 꼽았다.
사실, 이 목사가 재임했던 2006년 기성 총회는 교단 내 분쟁과 갈등을 유발하는 송사가 없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총회장을 맡고 대원칙을 정했어요. 총회 관계자에게 다툼의 소지가 있는 서류는 무조건 접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한 달 동안 금식 기도를 해보고 난 뒤, 그래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다시 오라고 돌려보냈지요.”
그는 항상 “송사엔 승자가 따로 없다”며 지혜로울 것을 권면한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기고 진자가 분명하지만 성서적으로 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억울하면 침을 꿀꺽 삼키면서 잊어버리라고 조언한다. 당장은 분하지만 나중에 보면 하나님이 다 채워주시기 때문이란다.
◆문준경 전도사는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17세의 나이에 결혼해 증도로 출가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그러던 중 성결교 부흥사인 이성봉 목사(당시 전도사)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집사 직분을 받아 헌신했다. 서울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을 나와 1933년 진리교회, 35년 증동리교회, 36년 대초리교회 등 6개 교회를 세우며 선교와 빈민구제에 힘썼다. 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됐고, 이 과정에서 문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수차례 고문을 당했다.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이번엔 공산주의자들이 문 전도사를 체포했다. 인민군은 주민에게 존경을 받는 그를 즉결처분하지 못하고 국군이 들어온 목포로 보냈다. 문 전도사는 그러나 무고한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며 증동리로 돌아왔다가 10월 5일 백사장에서 인민군에 살해됐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