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라덴·부시·후세인은 걸프만의 노예!… 설치작가 진기종 ‘지구보고서’展

입력 2010-08-22 17:36


거대 석유회사 ‘쉘(Shell)’의 유조차가 깊은 웅덩이에 빠져 있다. 밧줄을 몸에 맨 노예들은 유조차를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유심히 살펴보니 맨 앞의 노예 3명은 많이 본 사람들이다. 바로 오사마 빈 라덴과 아버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다. 나머지 노예들은 힘겨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휴대전화와 노트북으로 유가(油價) 그래프를 확인하느라 정신없다.

설치작가 진기종(29)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16번지에서 9월 19일까지 ‘지구보고서’(Earth Report)라는 타이틀로 여는 개인전에 선보인 디오라마(diorama·배경 위에 모형을 설치해 한 장면을 만든 것) ‘걸프만의 노예’다. 2차 이라크 전쟁 때 테러리스트 소탕과 비핵화의 목적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결국 빼앗고 빼앗긴 것은 검은 기름이라는 사실을 풍자하고 있다.

육중한 유조차 만큼이나 무거운 세상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의 유명한 그림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을 패러디한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걸프만의 석유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던 세 사람(빈 라덴, 부시, 후세인)이 마치 현대판 노예 같다”면서 “레핀의 그림 속 배를 유조차로 바꾸면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비디오 작업을 주로 해왔던 작가는 이번에는 박물관 등에서 과거나 미래의 시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디오라마로 기름유출과 아마존의 정글 파괴, 지구 온난화 등 환경 문제를 이야기한다. 지하 전시장의 작품들은 더욱 극적이다. 유조선이 침몰한 지중해에서는 푸른 바다 위로 검은 기름띠가 퍼져 나가고 새 모형은 유출된 기름으로 범벅이 됐다.

“어느 거대한 유조선이 기름을 운반하는 도중 바위에 그 몸을 헛디뎌 투명한 에메랄드 빛 지중해에 검정색 잉크를 쏟아버렸다. 파도에 밀려 들어온 검은 잉크를 피할 겨를도 없이 온몸이 검게 변한 서로 다른 종의 새들이 애처롭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고 작가노트를 붙인 작품 ‘지중해’와 ‘검은새’는 2007년 서해안에 검은 재앙을 몰고온 기름유출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빙하가 얼마 남지 않은 그린란드 위 조각난 얼음 위에서 엄마곰과 아기곰이 위태롭게 몸을 지탱하고 있는 ‘그린란드해’, 미국 할리우드 마운틴이 해수면 상승으로 섬이 되어버린 ‘헐리웃 섬’, 방사능에 노출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얼굴, 몸통은 하나인데 머리는 두 개인 금붕어 등 작가는 오늘날 일어나는 환경재앙의 현장을 보고(report)하고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관객들의 몫이다.

“2008년 첫 전시 때 조사를 했는데 우리 사회의 여러 사건들이 환경문제와 관련된 것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을 다루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환경을 보호하자’ 이런 차원은 아닙니다. 다만 현상을 재현하고 기록하고 싶은 거죠.” 환경문제를 유머러스하게 형상화한 그의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 ‘지금 사는 이대로 계속 살아간다면 지구도 우리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02-722-3503).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