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옥선희] 선물을 하려면
입력 2010-08-22 17:49
홈스테이 외국인은 선물을 준비해온다. 인형, 차 도구, 과자, DVD 등 작지만 그 나라와 그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선물을 볼 때마다 선물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한다.
호밀 호두과자는 군산의 박 선생님이 택배로 보내주셨다. 그는 내가 쓴 ‘북촌탐닉’을 좋게 읽으셨다며, 딸과의 북촌 나들이 길에 하룻밤 묵고 싶다는 뜻을 전화와 메일로 정중하게 부탁하셨다. 내국인은 받아본 적이 없는데, 이 원칙을 깬 데는 일본 가옥이 남아 있는 옛 거리, 채만식의 ‘탁류’, 오래된 빵집 ‘이성당’ 등 군산에 관한 아름다운 추억도 작용했다.
박 선생님은 이런 내 메일을 받고 부러 이성당에 빵을 사러 가셨고, 상중이라 영업을 안 한다고 해서 다른 가게의 호두과자를 주문해 미리 보내주셨다. 팥이 듬뿍 든 호두과자를 고르신 건 내가 “빵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는 역시 팥빵과 슈크림 빵이 아닐까요?” 했기 때문이리라.
양동이로 퍼붓듯 비가 쏟아지던 날, 박 선생 모녀와 발이 퉁퉁 불도록 북촌을 돌아다녔다. 아점 먹으러 간 레스토랑에서 박 선생은 후식으로 슈크림 빵을 사주셨다. 역시 내 메일을 기억하고 계셨던 거다. 이런 마음을 읽었기에, 나도 영화제를 포기하고 옷을 홀랑 적셔가며 북촌 안내를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가추마 히로미츠의 샤미센 연주곡을 듣는다. 이 CD는 독일인 클라우스의 선물이다. 악기 하나는 연주할 수 있어야겠다 싶던 차에 북촌 건너 일본문화원에서 샤미센 수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료 강습인 데다 줄도 세 개 뿐이니 돈 없고 재능 없는 내겐 안성맞춤이지 싶었다. 막상 배워보니 샤미센은 줄 세 개로 온갖 묘기를 부려야 하는 어려운 악기였다.
포기해야 하나 어쩌나 하는데, 클라우스가 자신이 즐겨 듣는다는 샤미센 CD를 선물했다.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때론 슬프게 때론 힘차게 천상을 오르내리는 연주에 나는 할아버지 연주자거니 했다. 알고 보니 아가추마는 내한하여 사물놀이 팀, 기타 연주자와도 협연했던 젊은 남자였다. 아, 얼마나 연습했기에 저리 연주할 수 있나, 감탄과 더불어 내가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작은 선물로 격려해주는 클라우스의 마음이 느껴졌다.
화장품, 지갑, 영양제, 머플러, 만년필. 선물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뻔하다, 성의 없다 싶으면서도 적은 돈으로 마음을 전할 상품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들 중 어느 것을 받아도 내겐 요긴하지 않을 것 같다. 받아도 고맙지 않고 부담스런 선물. 상대가 좋아하는 것, 필요한 게 무언지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면 작은 선물로도 큰 감동을 줄 수 있을 텐데.
선물을 하려면 상대에 꾸준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하리라. 그레타 가르보 기념 우표, 클린트 이스트우드 책으로 나를 감동시킨 미국 사는 친구의 정성을 배워야 하련만, 나는 언제나 시간 타령만 하며 게으름을 피운다.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