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과학이야기] 세균잡아 먹는 박테리오파지

입력 2010-08-20 17:54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보고된 신종 ‘슈퍼 박테리아(NDM-1)’가 유럽과 호주, 미국 등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슈퍼 박테리아는 어떠한 항생제에도 내성을 갖는 병원성 세균을 말하는데, 무분별한 항생제 남용이 출현의 원인으로 꼽힌다.

항생제로 사멸시킬 수 없는 이들 ‘초강력 세균들’은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과학자들은 항생제 내성균을 먹고 사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에 주목하고 있다. 인체에 무해하고 슈퍼 박테리아를 만들어낼 걱정도 없으면서 항생 효과는 뛰어난 ‘천연 항생제’로, 기존 합성 항생제를 대체할 수 있을 거란 전망 때문이다.

박테리오파지에서 박테리오는 ‘세균’이란 뜻이고, 파지는 ‘먹는다’는 뜻이다. 즉 박테리오파지는 세균을 잡아먹는 ‘살균 바이러스’다. 크기는 0.1㎛(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에 불과해 세균용 필터로 걸러도 거뜬히 통과하는 작은 생물이다.

박테리오파지는 1915년 영국의 세균학자 프레데릭 드워터가 처음 발견했다. 포도상구균을 키우다가 균이 투명하게 녹은 것을 발견하고, 그 부위를 떼어내 다른 포도상 구균에 집어넣었더니 그 균도 녹았다. 당시에는 그런 현상이 바이러스 때문이란 사실을 몰랐으나 1930년대 전자현미경이 등장하면서야 확인됐다.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박테리오파지는 머리와 꼬리로 돼 있다. 다각형으로 생긴 머리 내부에는 유전물질인 DNA가 들어있다. 세균 표면에 달라붙은 박테리오파지는 마치 주사기처럼 표면에 자신의 몸통을 꼭 부착시킨 뒤 DNA를 세균 속으로 주입한다. 이후 세균의 세포벽을 용해시키는 효소를 분비해 사멸에 이르게 한다. 감염하는 세균(포도상구균, 대장균 등)에 따라 박테리오파지의 종류도 다양하다.

박테리오파지가 보통 바이러스와 다른 점은 오직 세균만을 먹이로 삼아 증식한다는 것. 미국 록펠러대 빈센트 피셰티 박사는 “오래전부터 박테리오파지를 세균 죽이는 수단으로 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효용성 등 문제로 얼마 전까지 무시됐었다”면서 “하지만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 박테리아가 늘어나자 세균을 죽일 새로운 수단이 필요해졌다”고 말한다.

피셰티 박사는 박테리오파지로부터 세균의 세포벽을 용해시키는 효소(lysine)를 추출해 항생제를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바이오기업 인트론바이오테크놀로지 등이 비슷한 방법으로 항생제 ‘메티실린 내성 슈퍼박테리아(MRSA)’를 치료하는 대체 항생제를 개발했다. 현재 효능 및 독성 시험을 끝내고 올해 안에 임상1상 시험에 들어갈 예정이다. 제품화에는 2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박테리오파지의 진화를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려하고 있다. 진화과정에서 자칫 인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돌연변이 출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