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상온] “이민 가야지”
입력 2010-08-19 19:24
“공허한 ‘베스트 국가’보다는 국민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를 만들어야”
얼마 전 한 지인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집안에 있는데 옆 다세대주택 아래층에서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나더라구. 얼른 밖으로 나와서 연기가 나오는 창으로 들여다봤지. 젊은 남자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주방 가스레인지 위에 종이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있잖아. 그 집 바로 위가 우리 집 베란다인데 거기엔 가스통이 있거든. 혼비백산해서 이웃들 대피시키고 119와 112에 전화를 걸었어. 조금 있으니까 파출소에서 경찰관들이 오고 소방차도 왔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종이더미가 책 같은 것들이어서 불이 금세 커지지 않은 거였어. 소방관들이 집에 들어가 불을 끄는 동안 젊은이는 방안으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잠갔어. 방 안에서는 뭘 때려 부수는 요란한 소리가 계속 들렸구.
알고 보니 그 젊은이는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었어. 위험인물이니까 당장 데려가라고 소방관과 경찰관들에게 요구했지. 그런데 소방관들은 잠긴 방문만 부숴놓고는 그냥 돌아갔어. 경찰 책임이라는 거지. 경찰관들은 정신이상자는 보건소나 지정 병원에서 데려가야 한다면서 그쪽으로 연락을 했어. 보건소에서 젊은 여자 간호사 두 명이 왔지만 상대가 위험해 보이니까 어쩔 줄 모르고 한쪽에 비켜서 있기만 하는 거야. 병원 사람들은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오지도 않았고.
젊은이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마냥 방치하고 있는 꼴이 기가 막혀서 일단 경찰관들이 데려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 그랬더니 소방관들이 문을 부수는 동안 멀찌감치 피해 숨어있던 경찰관들이 ‘인권’ 어쩌고 하면서 움직이질 않는 거야. 확 열이 오르더군. 방화 현행범을 연행하는데 무슨 놈의 인권이냐, 이 동네에 가스 배관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데 저 사람이 또 불을 질러 동네 전체가 날아가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본서와 언론사에 연락하겠다고 난리를 쳤지. 그제서야 경찰관들은 마지못해 젊은이를 데려갔어. 5∼6시간 동안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조마조마했는지…”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 “갈수록 이 나라에 정이 떨어져. 이민가는 걸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로부터 며칠 후 도하 각 신문에는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다. ‘한국, 베스트 국가 15위.’ 미국의 시사주간 뉴스위크가 세계 최고의 나라(The Best Country) 순위를 매긴 결과 ‘놀랍게도’ 한국이 전체 100개국 중 15위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오늘 태어난다면 어느 나라가 건강과 안전, 그리고 상당 수준의 부유함을 누리면서 사회적 상승을 가능케 할 역동적인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 이 어찌 경사스러운 희소식이 아니랴. 국민도 정부도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기사를 접하면서 나는 예의 지인을 떠올렸다. 피곤하지 않아도 될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받게 해 이민을 고려하는 국민이 존재하는 우리나라가 진짜 세계 15위의 베스트 국가가 맞는 거야? 라는 생각이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까지 종종 보도된, 이번 뉴스위크 조사결과와는 동떨어진 각종 국가만족도 조사라든지 국민행복지수(행복도) 조사 같은 것들이 그런 생각을 더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거의 모든 국가만족도나 국민행복지수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하위권, 기껏해야 중위권이다. 도대체 뉴스위크 조사결과와 왜 그렇게 다른 걸까? 아마도 겉으로 드러난 숫자로서의 지표와 국민들이 실생활에서 겪는 경험과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뉴스위크가 비교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5개 지표 중 교육만 해도 그렇다. 뉴스위크는 ‘국민의 읽고 쓰는 능력’ ‘평균교육기간’을 비교하면서 “한국 학생들은 대학교육을 마칠 가능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라고 칭찬했다. 그렇지만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학생과 학부모가 어떤 고역을 겪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민 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인가.
외면적인 ‘베스트 국가’보다 국민행복지수가 상위인 우리나라를 보고 싶다.
김상온 카피리더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