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낯선 땅… 그래도 꿈 이룰 거예요”
입력 2010-08-19 17:32
우리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보이스프로젝트팀/삶이 보이는 창
우리 사회에서 ‘차별’은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여럿 중에서 외국인 같으면 차별하고, 한국인 여럿 가운데 혼혈 같으면 차별하고, 나머지 중 북한 출신 같으면 차별한다. ‘순수혈통’ 한국인만 있는 것 같으면 지역을 갈라 차별한다. 다수에 속한 사람이야 자신에 대한 편견 섞인 말이 나돌더라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게다. 그러나 침묵하는 소수들은 다르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우리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삶이 보이는 창)는 무지개청소년센터 보이스프로젝트팀이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 12명을 인터뷰해 이들 각자의 세세한 사연을 담은 책이다. 여기 등장하는 15∼24세의 남녀 청소년들은 북한, 몽골, 중국, 베트남, 미얀마,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지에서 한국으로 온, 다양한 이주 경험을 갖고 있다. 결혼이민을 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거나,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고 탈북했거나,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난 뒤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들의 사연이 펼쳐진다.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험난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자존감을 지켜나가는 아이들의 강한 모습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문화적으로 낯선 땅에 살면서도 결코 꿈만은 버리지 않는다. 밟히고 상처입지만 쓰러지지 않는 건 내일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리라.
몽골에서 온 열아홉 살 소녀 유리는 한국 국적의 몽골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봉사 활동과 통역 등의 경험을 통해 자각하고 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된 경우. 유리는 몽골어를 잊지 않기 위해 몽골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고, 몽골어 보습 학원에도 다녔다. 몽골에 봉사 활동을 다녀오면서는 한국인과 몽골인들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와 편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이제 유리는 자신의 위치에서 한국과 몽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어엿한 고등학생이다. 한국에서 힘들게 일하면서도 고국의 민주화를 위한 공동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미얀마 출신 모우냑, 스스로를 ‘불법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옷 가게 사장님이 되겠다고 말하는 방글라데시 출신 자말도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 공공연한 인종 차별과 제도적 불합리에 맞서면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책은 어느덧 사춘기를 맞은 우리 사회 안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피부가 가무잡잡하다는 이유로 학교 친구들이 ‘아프리카 사람’이나 ‘초코파이’로 불러도 왕따가 되는 것보단 낫다는 루시, 옷가게에서 가격을 물어봤더니 “비싸”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 반말을 들었다는 모우냑…. 언어가 통하는 탈북 청소년들도 보이지 않는 편견과 싸워야 하는 것 별반 다르지 않다. 승호는 “전 북한 사람도 아닌데 그렇다고 한국 사람도 아닌 거예요”라고 말하며 혼돈스러운 정체감을 드러낸다. 북한과는 다른 남한의 교육과정 때문에 학업을 따라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흔들리지 않고 일상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아이들의 의지만으로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나가길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 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는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려 하는 아이들의 힘겨운 몸부림에 대한 책이자, 용기를 잃지 않고 지키려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대학 입학을 꿈꾸는 새터민 명일이는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전 괜찮은 애라고 생각해요. 대단하다는 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 보는 거예요.”(205쪽) 꿈을 꾸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꿈을 이루기 쉽지 않은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묻는다. ‘다수’에 속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