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성혜영] 교토의 여름 古書축제

입력 2010-08-19 17:54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우리말로 옮기자면 ‘진실을 밝히는 숲’쯤 될까. ‘다다스노모리(?の森)’. 교토 ‘시모가모(下鴨)신사’의 경내 원시림 이름이자 별칭이다.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 수령 200년이 넘는 나무만도 600여 그루라는 깊고 넓은 숲이다. 1994년, 숲을 포함한 신사 전 지역이 세계문화유산에 올랐다.

3만6000여평이라던가. 도쿄돔의 3배에 육박한다는 크기도 그렇지만 원시자연림이 도시 한가운데 이토록 잘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놀랍다. 내가 교토에 살면서 누리게 된 가장 큰 호사도 아마 마실 삼아 운동 삼아 이 경이로운 자연 속을 ‘산보’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더욱이 종종 특별한 잔치로 사람들을 초대하기라도 하면, 일본이라는 나라의 저력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지난 주말, 연례의 여름 고서축제가 그곳에서 열렸다. 신사의 본전으로 향하는 참배의 길은 다다스노모리를 관통하는 제법 넓고 긴 길인데, 그 길의 양편으로 늘어선 간이 서가들 위에 오래된 책이 도열해 있다. 열기를 식히는 숲의 공기 속에 고서 특유의 곰팡내가 섞이면서 풍기는 묘한 향기, 매미 소리와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과연 교토가 자랑하는 한여름의 풍물시다.

고서 마니아인 듯 보이는 배낭을 진 젊은이도 있고, 한 손은 부채, 또 다른 손은 연인이나 가족과 맞잡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돋보기 너머로 독서삼매경에 빠진 노인이 있는가 하면, 그림 동화구연을 하는 열정적인 연사 앞에서 초롱초롱 눈망울을 밝히는 몇 무리의 아이들도 있다. 일요일 오후, 낡고 늙은 것들이 새롭고 젊은 것들과 어울리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주제별 서가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야나기 무네요시 전집(柳宗悅全集)’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든다. 철학자이자 일본 민예운동의 선구자인 그가 조선을 사랑한 지식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광화문 이전 보존의 동기가 되었다는 ‘사라지려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 등 조선을 생각하는 그의 글들을 다시 넘겨보니 열광적 국가주의의 광풍으로부터 자유로운 한 지식인의 마음의 결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엽서와 포스터 서가에서 복원 전 석굴암과 불국사의 사진, 이토 히로부미 기념엽서 등도 함께 챙긴다. 잃어버린 시대, 사라졌지만 잊히지 않고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종종 오래된 책 속에서 만난다. 역사도 문화도 인간의 이야기일진대, 독립투사와 친일파 사이, 영웅도 투사도 아닌 수많은 인간의 흔들리는 마음이 나는 늘 궁금하다.

‘진실을 밝히는 숲’은 넓고 깊지만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진실에 이르는 수많은 길을 보여 줄 뿐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단다. 그러나 그 길은 가지 않은, 가지 못한 길이다.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던가. 고서 산책이 늘 그리운 이유다. 새로운 역사는 그리움과 갈망에서 시작한다니, 어떤 그리움이어야 할까 새삼 생각해 본 날이었다. 8월 15일, 마침 광복절이었다.

성혜영(박물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