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아와 산행모임 15년… 남기철 집사의 신앙·비전

입력 2010-08-19 17:50


“하나님께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온 세상을 둘러보신다고 합니다. 어디로 보내야 이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을지 둘러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집이 우리 집이고 보내진 아이가 범선이지요. 우린 아이를 통해 많은 것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매주 토요일 자폐장애아들과 등산을 하는 남기철(58·열린비전교회) 집사는 아들로 인해 고난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은 분명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아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됐고, 감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고난은 변장된 축복

“아빠! 교회 가자.”

1988년 어느 주일 아침. 여섯 살 범선이가 엄마와 교회에 가기 위해 아파트를 나서면서 난생 처음 아빠에게 한 말이었다. 두 살 때 자폐장애 판정을 받은 후 온갖 방법으로 치료했지만 대화가 전혀 되지 않던 아이였기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날 아들을 데리러 교회에 갔던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만났다.

머리가 많이 벗겨진 장로님 한 분이 범선이를 안고 그네처럼 흔들어주고 있었다. 아이는 얼마 남지 않은 장로님의 머리카락을 쥐어 뽑으며 깔깔대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뽑히면서도 아이를 친손자처럼 돌보고 있는 장로님을 보는 순간 “예수님이 바로 저런 분일까”란 생각을 했다. 이후 그는 아내와 아이의 뒤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신앙을 가진 후 마음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자기 손등을 물어뜯는 아들의 손을 붙들고 울면서 기도했다.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누군가를 돕고 싶어 시작한 교회학교 교사는 20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그 무렵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들은 특수학원 원장의 권유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가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라서 색소폰 연주는 사치라고 여겼다. 그러나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촛불 끄는 훈련부터 했다. 입에서 바람이 한 곳으로 나가야 촛불이 꺼지는데 아들은 집중하지 못해 촛불조차 끌 수 없었다. 6개월 동안 아무런 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아들이 1년 6개월 만에 ‘학교종’을 연주했을 때 그와 아내는 박수를 치며 감격했다.

아들은 색소폰 연주를 통해 세상과 조금씩 소통해 갔다. 첫 연주는 장애인 주간에 열린 주일예배 시간이었다. 그는 아들을 격려해주고 싶어 친구들을 박수부대로 동원했다. 범선이가 혹시 실수할까 두려워서 눈을 감고 연주곡 ‘예수께로 가면’을 들었다. 연주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타인의 반응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아이가 신기하게도 빙긋이 웃었다. 자폐가 한 꺼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범선이는 친지들의 결혼식 축주, 교회 초청 연주,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의 ‘헨리 데이비슨 상’ 수상축하 연주를 했고 발달장애 청소년으로 구성된 하트하트윈드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 등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부인 이미호(56) 권사는 5년 전, 남서울은혜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예배에서 범선이가 농아 수화찬양단과 함께 ‘아주 먼 옛날’을 연주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연주하는 동안 범선이는 아픈 아이가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렸어요.”

◇천사들의 산행

그는 현재 ‘밀알천사 산행모임’을 이끌고 있다. 지난 1995년 7월. 집에만 있는 열세 살 자폐장애 아들이 안타까워 아들을 데리고 검단산에 오른 것이 모임의 시작이었다. 이 모임은 자폐장애 아이들을 돌보느라 지친 부모들에게 작은 휴식과 기도의 시간을 주고, 외부 활동이 제한된 자폐장애 아이들에게 정신적 육체적인 회복을 주기 위해서 지난 15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현재 밀알천사 산행에는 매주 50여명의 천사(자폐아)와 짝꿍(도우미)들이 함께하고 있다. 남 집사는 “짝꿍들이 많이 참여하면 더 많은 천사들이 산행을 할 수 있어요. 청계산을 3시간 정도에 걸쳐 등반하고 있어요.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폐장애인들에게 일이 ‘작업치료’라고 생각하는 그는 지난 5월 서울 일원동에 쿠키와 빵을 만들어 판매하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카페 ‘래그랜느’를 열었다. 프랑스어로 ‘씨앗’(les graines)이란 뜻이다. 자폐장애인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문을 연 곳이다. 현재 범선(28)씨와 이미호 권사가 함께 쿠키를 만들고 있다. 앞으로 자폐장애인들이 제조뿐 아니라 서비스까지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킬 계획이다.

자폐장애아 부모들의 소원은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다 죽는 것’이라고 한다. 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를 두고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 집사는 “자폐장애아도 홀로 설 수 있어요. 물론 거기엔 부모의 숨이 막히는 기도가 뒷받침돼야 해요”라고 말한다. 올해 말 아들과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날 계획인 남 집사는 장애 아들을 둔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 이야기를 담은 ‘그래서 사랑하고 그래도 사랑한다’(아가페)를 최근 출간했다.

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