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없는 광화문의 5개월 어떠셨나요?
입력 2010-08-19 18:06
지난 4월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재개관을 10일 앞둔 17일 책 정리에 한창이었다. 문 걸어 잠그고 내부수리를 한 지난 5개월.
소동은 수요자와 공급자 양쪽에서 모두 벌어졌다. 공급자인 출판사는 매출이 떨어져서, 동네서점 찾기가 갈수록 힘들어진 소비자는 책 고를 곳이 없다며 아우성쳤다.
결국 9월 1일 예정됐던 재개관은 닷새 이른 27일로 앞당겨졌다.
‘광화문교보’에는 연간 1500만명의 방문객이 와서 하루 2만∼3만권씩 1000만권의 책을 사들인다. 매장은 강남점이 10% 이상 크지만 매출에서는 광화문점이 교보문고 전체 매출의 31.4%(오프라인 기준)로 굳건히 1위다. 소설, 아동, 인문사회 책이 고루 팔리는 곳도 광화문점이 유일하다.
8600㎡ 크기의 서점 하나. 작지 않지만 결코 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곳. 추억은 상당하되 유서 깊다고까지는 할 수 없는 30년 역사의 공간이 행사하는 힘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고작 5개월 휴점으로 꽤 많은 독자와 저자, 출판인들이 광화문교보의 부재를 실감했다. 더불어 서점은 제가 가진 사회문화적 파워를 제법 시끄럽게 과시하는 중이다.
전국구 서점
광화문교보가 가진 영향력은 매출에서 나온다. 특히 인문사회과학 출판사의 광화문점 의존도는 커서 매출 비중이 10∼15%나 된다. 이들 출판사를 지식생산의 거점이라 한다면, 한국사회 지식생산 동력의 1할 이상을 단일 매장이 지고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 10%의 판매 파워가 적어도 단기간에는 대체되기 어렵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광화문점 판매가 매출의 7∼8%를 차지한다는 출판사 루비박스 원형준 대표는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타격이 크더라. 광화문점이 없으면 다른 데서 더 팔리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했다. 실제 이 기간 온라인 서점 매출은 늘지 않았다. 온라인 시장 1위 예스24는 올 봄 판매량이 지난해와 비슷하다고 밝혔다. 광화문점이 내놓은 10%의 독자들이 공중에 날아간 것이다.
사라진 시장만큼이나 영향력의 공백도 컸다. 그간 광화문교보는 이슈와 트렌드가 제조 확산되는 진앙의 역할을 도맡아 왔다. 3만8000여개(종로구 등록) 기업과 정부중앙청사, 박물관, 공연장 등을 중심으로 모여든 오피니언 리더가 주로 찾는 도심 서점이기 때문이다.
“광화문점의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이 간단치 않아요. 여기서 베스트셀러가 탄생해 전국으로 파급되는 것이거든요. 트렌드도 광화문점에서 만들어지고.”(휴머니스트 김학원 대표)
흐름출판사 박상준 마케팅팀장도 “광화문점에는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늘 손님이 북적이는데 그중에는 여론주도층이 많다. 책을 꼭 사지는 않더라도 이들이 책을 참고하고 입소문을 낸다. 이슈를 확산시키는 힘은 다른 어떤 서점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최근 일본 역사서 ‘쇼와사’를 낸 원형준 대표는 “심각하지만 의미 있는 책이어서 광화문점이 있었다면 좀더 반응이 컸을 텐데”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눈 밝은 ‘광화문 독자’라면 책의 가치를 더 적극적으로 평가해줬을 거란 얘기다.
출판계가 교보문고 측에 끈질기게 조기 재개관을 요청해온 것도, 재개관일까지 출간을 늦추며 기다리는 출판사가 많은 것도 이런 광화문교보의 힘과 관련 있다. 확실히 출판계가 느끼는 광화문교보의 빈자리는 매출 10% 이상이다.
“이슈가 만들어지는 거점이 사라지니까 매출이 10%만 준 게 아니라 훨씬 큰 시장이 사라진 느낌이 들어요. 타격이 워낙 커서 영업자들은 다음주 재개관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박상준 팀장)
광화문점은 편집자들 사이에서는 최적의 시장조사지로도 꼽힌다. 신간의 생존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험대가 광화문점이라는 얘기다. 이유는 소비층이 직장인, 초·중·고교생, 주부 등으로 폭넓어 ‘대한민국 표준마켓’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동이 강세인 강남점, 학습서가 잘 팔리는 목동점과 달리 광화문에서는 인문사회, 소설, 아동, 기술공학까지 다 잘 팔린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강남점에는 강남 스타일의 소비 패턴이 있는데 광화문점에는 그런 게 없다. 일종의 전국구 서점”이라고 설명했다.
광화문교보를 사랑하는 독자들
“짝짝짝. 드디어 재오픈. 내 유일한 낙은 교보문고에서 쇼핑하는 거였는데. 정말 장장 4개월 넘게 기다렸다!!!” “리노베이션으로 우리 만남의 장소는 궁지에 몰렸다. 친구의 지각까지도 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보문고.” “드디어 갈 만한 곳이 복구됐네. 서점 찾아다니느라 ‘잉여짓’ 안 해도 되겠다.”
광화문점 재개관을 앞두고 인터넷 공간에는 기대가 넘쳐났다. 지난 30년 광화문교보가 확보한 두텁고 풍성한 단골의 힘이다. 고객 중 유명 작가, 인기 강연자, 기업 경영자는 넘치도록 많았다. 신길례 광화문점 문학 담당 매니저는 “작가 김훈씨가 자주 오고 황석영 이문열씨도 와서 둘러보고 책을 많이 사간다”고 했다.
매장 직원들이 기억하는 단골 중에는 도심 광고회사에 14년을 근무한 ‘행복디자이너’ 최윤희씨도 있었다. 그는 광화문교보를 “산소호흡기 같은 장소”라고 했다.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는 숲에 삼림욕 가듯 하루에 몇 번씩 책으로 산소욕하러 서점에 갔어요. 지금도 틈만 나면 광화문교보에 들러요. 다른 서점도 많지만 익숙하지 않거든요. 광화문점이 문 닫은 동안 정말 깝깝했어요. 광활한 책장 사이에서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아쉽던지. 재오픈하는 날만 기다려요.”
대학 2학년 휴학 중인 임진혁씨도 재개관을 손꼽는 열혈팬 중 한 명이다. 집은 서울 노원구 쪽이지만 1주일에 적어도 한 번, 많으면 두세 번 광화문교보에 ‘놀러’ 간다. 그는 “친구 만날 때도 ‘교보에서 책 읽고 있을 테니까 연락해라’ 이런 식이다. 읽어보고 사기도 하고 그냥 읽기만 하기도 하고. 정작 사는 책은 한 달에 한 권 정도”라며 웃었다.
하루 몇 시간씩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매달리는 이장우 소셜미디어마케팅랩 대표. 그는 유독 서점만은 오프라인을, 그중에서도 광화문교보를 고집한다.
“해외 출장이 잦아 외국 이곳저곳에 단골 서점을 만들어놓았어요. 싱가포르에서는 키노쿠니아, 태국에서는 아시아북스, 이런 식이에요. 서울에서는 광화문교보에 가죠. 책 향기를 맡고 뜻밖의 책과 조우하는 게 좋아요. 신발 사러 갔다가 스카프, 가방까지 사듯 이 책 사러 갔다가 이 책 저 책 사들고 와요. 광화문점에는 근사한 커피숍이 없다는 게 늘 아쉽긴 하지만.”
서점을 이용하는 모양새는 가지가지다. 최윤희씨는 “서점 구석에 혼자만 아는 전용 자리를 만들어놓고 거기 서서 읽는다”고 했다. “아이디어가 안 떠오를 때는 하루 종일 광화문점 안을 뺑뺑 돌아다닌다”(이장우 대표)거나 5년 단골인 20대 직장인 김광옥씨처럼 “베스트셀러부터 살펴보고 관심 있는 분야의 매대로 이동하며 책을 고른다”는 이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광화문교보에 대한 단골의 열광 속에는 정반대 현실이 들어 있다. 1990년대 중반 5300곳을 넘던 오프라인 서점은 온라인 서점이 급성장하면서 2000여곳(2009년 기준)으로 줄었다. 독자가 책을 실물로 만날 공간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다. 종이책을 만져보고 싶은 소비자 욕구는 여전한데 실현할 장소는 없어지니 갈 데 없는 책벌레들은 광화문교보로만 몰려든다. 새단장하는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안팎에서 목을 매는 이유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