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의 수다] 색깔 드러내기
입력 2010-08-19 18:11
서울의 여름은 진기한 풍경들과 함께 찾아온다. 청계천에서 조깅을 하다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가려서 마치 엄격한 회교도처럼 보이는 중년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 햇볕은 한국 여성 최대의 적이다. 아주머니는 외출할 때 양산을 챙기고, 아가씨들은 SPF(자외선 차단 지수) 50의 자외선 차단제를 두껍게 바른다. 그리고 저녁마다 화이트닝 제품으로 정성껏 피부를 관리한다.
수영장에 가는 일도 쉽지 않다. 지난해 여름 가본 한강야외수영장 잔디밭은 텐트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햇볕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햇볕이 싫으면 집에 있으면 될 텐데 왜 굳이 야외수영장까지 와서 텐트 속으로 숨어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독일은 정반대다. 공원, 호수, 해변, 하다못해 자기 집 정원이라도 풀밭만 보이면 옷을 훌훌 벗어젖히고 선탠을 한다. 개중에는 나체로 햇볕을 쬐는 사람도 있다. 독일인은 여름만 되면 하루라도 빨리 구릿빛 피부를 만들고 싶어 안달하기 때문에 SPF 25 이상의 화장품을 쓰는 걸 찾아보기 힘들다. 과도한 태닝으로 화상을 입는 일은 멋진 피부색을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쯤으로 생각한다. 선탠 스튜디오에서 인공으로 살을 태우거나 바르면 구릿빛으로 변하는 선탠크림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는 하얀 피부가 미인의 조건이지만 북부 및 중부 유럽, 북미 사람들은 흰 피부를 별로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화이트닝 제품, 자외선 차단제, 미백화장품이 사용되는 만큼 독일에서는 선탠크림과 선탠파우더가 돌아다닌다고 보면 된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인터넷에서 미백에 효과가 있다는 신제품과 민간요법에 대해 정보를 나누듯 독일의 코스메틱 블로그들은 선탠 제품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난다.
나는 판이한 한국과 독일의 여름 풍경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독일인은 선탠 광증으로 조기 피부노화, 심한 경우 피부암 위험에 노출된다. 반면 한국의 태양 금욕주의는 만성적 비타민D 부족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비타민D는 태양광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백 제품의 표백 성분이 암을 유발할 수도 있어 과도한 화이트닝은 과도한 선탠만큼이나 위험하다.
피부색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현대의 새 트렌드가 아니다. 중세에는 야외에서 일할 필요가 없는 고귀한 신분이라는 표시로 하얀 피부가 미의 기준이었다. 반면 20세기 서양에서 등장한 제트족(jet setter)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갇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계급의 의미로 휴가지의 구릿빛 피부를 유행시켰다. 과도한 선탠이나 강박적 미백은 신분에 대한 망상, 미의 편파적 기준, 인종차별과 연관돼 있다. 21세기 사람들이 이런 과거의 사고에 갇혀 타고난 피부색을 바꾸려 한다니 애석할 뿐이다.
지구의 7대륙에는 우윳빛, 연한 핑크빛, 골드브라운, 캐러멜색, 올리브색, 빛나는 밤색, 어두운 커피색까지 다양한 피부색이 존재한다. 구태의연한 미적 기준을 따라가려고 애쓸 게 아니라 이 다양성을 축하하고 즐기는 편이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베라 호흘라이터(tbs eFM 뉴스캐스터)
번역 김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