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부른 美·日의 추악한 거래

입력 2010-08-19 17:33


‘임페리얼 크루즈’ 제임스 브래들리 지음·송정애 옮김/프리뷰

“큰형님 미국이 우리를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숨통을 점점 조여 오고 있을 때에도 고종황제는 굳게 믿었다. 1882년 체결된 조미통상 수호조약에 근거한 기대감이었다. 전문 14개조로 구성된 조약에는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고 적혀 있었다. 고종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단히 도덕적이며 공명정대하다고 믿고 있었다.

고종의 믿음은 1905년 9월 19일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가 한국을 찾았을 때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된 지 2주후였음에도 고종은 아직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단 한차례도 외국인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던 고종은 앨리스에게 성대한 오찬을 베풀었다. 앨리스는 훗날 “전반적으로 다소 연민을 자아내는 분위기였다. 그는 여러 벌의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의복을 입었고 슬퍼보였다. 전혀 호화롭지 않았다. 식사를 하러 들어갈 때 그는 다정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고종의 팔을 잡지 않았다.

앨리스를 환대한 것은 ‘큰형님’ 루즈벨트를 움직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앨리스가 한미 우호를 위해 축배를 든 지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루즈벨트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을 폐쇄하고 한국을 일본군 앞에 내버려 뒀다. 루즈벨트는 공공연하게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다.

1905년 7월 2일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을 파견했다.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 다수의 군인 및 민간 관료 등 모두 80여명과 자신의 딸 앨리스를 사절단에 포함시켰다. 사절단장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장관이었다. 이 ‘제국주의 순방(Imperial Cruise)’을 통해 루즈벨트는 향후 수세대 걸쳐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앨리스를 사절단에 포함시킨 건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아름답고 매력 넘치는 스물한 살 여성을 포함시켜 정치적 의도는 감추고 시선을 분산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와이를 거쳐 7월 25일 일본에 도착한 사절단은 은밀한 일을 추진한다. 불과 4일 후인 29일 두 나라는 바로 일본의 한국 침략을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다.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 승인 없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는 건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은 당시 사상 최대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정직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해 여름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마무리됐고 루즈벨트는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벨위원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 밀약은 1924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이 일본과의 밀거래를 통해 한국 침략의 길을 열어준 것은 엄연히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훗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비난에 대해 “조약은 대한제국이 스스로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 의거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자치나 방어에 있어 완전히 무능력했다”고 자신의 결정을 옹호했다. 하지만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 미국의 결정은 훗날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불씨가 된다. 한국을 집어삼킨 일본은 이후에도 제국주의적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급기야 1941년 미국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오히려 미국의 숨통을 조여 온다.

저자 제임스 브래들리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태평양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성조기를 게양한 생존 미해병대원 중에 한 병이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목숨을 내 건 끔찍한 전쟁의 발화점이 어딘지 찾기 시작한 저자는 제국주의 순방으로 표현되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