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문일] 과거 말고 미래를 봅시다

입력 2010-08-18 22:02

8월, 역사의 계절이다. 광복절이 지나면 국치(國恥)의 기억이 뒤를 잇는다. 더욱이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는 역사의 큰 눈금이다. 때를 맞춘 듯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 있던 광화문이 제자리, 제모습을 찾았다. 시원하게 열린 대문 뒤로 펼쳐진 경복궁의 단아한 전개. 반가움을 기리는 양 여기저기서 사진 찍기에 바쁘다. 시인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다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설렁탕집 주인여자에게 욕을 하는 옹졸한 자신을 자학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하지만 오늘 우리는 160년 전 모습으로 복원되는 왕궁을 자랑스러워한다.

광화문도 민족정기라니

역사에서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기보다 과거 유한(遺恨)을 되새기는 게 근자의 풍습이다. 지나간 역사의 흠결을 어떻게 하면 지울 수 있을까 골몰하기도 한다. 어떤 학자는 망국 황제 고종을 계몽군주로 만들려 애쓴다. 무당을 끼고 앉아 매관매직과 안동김씨보다 더한 족벌정치를 한 것으로 야사에 기록된 명성황후는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거듭나 안방을 울린다. 광화문 편액(扁額)을 둘러싼 논란도 권력자들의 한풀이에서 비롯됐다. 박정희의 글씨를 떼어내고 대신 정조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편액을 만들려던 당시 권력자의 뜻이 여론에 부딪히자 복원 원칙으로 방향을 바꿔 기어이 박정희를 지워버렸다.

경복궁 복원 계획이 수립된 1989년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전두환 시대의 3저(低)호황으로 축적된 국부(國富)를 주체 못하던 시절이다. 돌려받기 어려운 줄 알면서 러시아에 30억 달러 차관을 줄 정도로 여유를 과시하던 풍조에서 경복궁 복원이라는 대역사도 계획됐을 것이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고 국고를 바닥내 가며 경복궁을 중건했지만 지금의 복원은 어떤 의미일까. 일제가 훼손한 것을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세운다는 사람이 있지만 경복궁이 파괴되다시피 한 것은 6·25 전란 중이다. 반(反)서민의 아이콘이라 할 왕궁이 민족정기와 무슨 관계일까. 오늘날 의미 있는 경복궁 역사는 고종과 순종의 역사다. 자랑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자금성은 박물관으로도 활용되지만 복원된 경복궁은 관광지 이상의 용도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역사가 100년쯤 지나면 문화소비재가 되는 게 자연스럽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경우 드라마와 소설의 소재가 돼 있고 앞으로도 무한한 변주(變奏)가 나올 수 있다. 명성황후가 시위무사와 연애를 했다는 괴이한 설정의 영화도 나왔다. 어느 학자의 희망대로 계몽군주가 된 고종의 좌절, 대원군이 외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힘을 쌓은 뒤 자력으로 개국하려 했다는 설정도 있을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나 이완용 같은 캐릭터도 파격적인 관점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요컨대 역사에 짓눌리지 않고 역사를 적극적으로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은 단음단향(單音單響)적이다. 과거사를 자본으로 삼아 행세하는 정치인 학자 문화인들의 기득권이 여러 개의 소리가 다양한 울림을 만드는 폴리포닉(polyphonic)의 역사관을 방해하고 있다.

지난 역사보다 닥칠 역사를

올해부터 광복 100년인 2045년까지 35년이 남았다. 그때까지도 과거사의 한이나 되새기고 있기엔 나라의 상황이 각박하다. 밖에는 북한의 핵 위협과 중국의 핍박이, 안에는 좌우 대립과 계층 갈등이 심각하다. 과거만 쳐다보다가 앞길을 잃을까 두려울 지경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말한 통일세의 함의(含意)는 국가 시스템을 갑갑한 좌표에서 벗어나게 하는 침로(針路)가 될까 기대됐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자는 뜻”이 돼버렸다. “중국은 공산당 하급 간부들의 입에서도 국가의 목표가 척척 나온다”는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충격 보고가 놀랍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