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도영] MB의 약속

입력 2010-08-18 17:44


이명박 대통령도 가끔 공수표를 발행한다. 2009년 광복절 경축사를 다시 읽었다. 본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경축사 중 정치개혁과 대북 제안을 주요하게 다뤘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경축사에서 남북 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고위급 회의 설치를 제안했고, 재래식 무기 및 병력 감축을 제안했다. 또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편과 행정구역 개편을 제안했다. 친서민 정책으로는 ‘민생 5대 지표(소득 고용 교육 주거 안전)’ 개발을 약속했다.

아쉽지만, 언론이 주요하게 다뤘던 이 대통령의 제안 중 제대로 진척된 사안은 별로 없다. 남북 관계 악화는 천안함 사태를 일으킨 북한에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선거제도 개혁과 행정구역 개편 논의도 이 대통령에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 국회의 임무 방기를 지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이 지난 지금 뒷맛이 개운치는 않다.

민생 5대 지표 개발은 이 대통령이 책임질 부분이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획기적인 지표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지표가 나온 적은 없다”고 자랑했는데, 아직까지 ‘그런 지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대통령의 ‘공수표’ 중 가장 뼈아픈 대목은 경제일 듯하다. 이 대통령의 집권 초반 정책은 ‘대기업 프렌들리’이고 ‘비즈니스 프렌들리’였다. 분배보다는 성장이었다. 당시 여권 사람들은 ‘트리클 다운(Trickle-Down)’이론을 자주 언급했다. 정부가 투자 증대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먼저 늘려주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경제발전과 국민복지가 향상된다는 이론이다.

기자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부유층에게만 혜택을 주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면, 여권 관계자들은 트리클 다운 이론을 자주 언급했다. 친이계 재선 의원도 “위의 물이 차야 아래로 흐른다”고 자신했다. 그 뒤 2년이 흘렀다. 위의 물이 덜 찼는지, 아래로 흐르는 물길이 막혔는지는 정확지 않으나, 물이 아직 아래로 흐르지 않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4일 보건복지가족부 노동부 여성부 등 서민·고용 분야 2010년 업무보고에서 “아마 내년 하반기쯤 되면 서민들도 (경기회복 기운을) 체감하지 않겠나 본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8월이다. 하반기인데 아직 서민들은 경기회복 기운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올해 초 약속했던 교육 개혁이나 검찰·경찰 개혁도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정확지 않다. 교육이나 검·경 개혁 문제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수없이 얽혀 있는 난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개혁 선포’에 비해 진행 과정이나 성과물은 별로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이 미약한 꼴이다.

대통령의 약속은 일종의 ‘방향 설정’ 기능이 강하다. 남북 관계나 경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향을 잡는 약속이다. 약속 이행 여부보다는 대한민국 전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제안이나 약속이 문제제기 수준에 그치는 것은 대통령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당장 이 대통령이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세와 개헌 문제를 제기했지만, 여당 내부에서조차 반응이 시원치 않다.

이 대통령을 상징하는 단어는 ‘일’이다. 집권 후반기 당·정·청 진용을 측근들로 배치한 것도 일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 대통령이 수차례 “레임덕은 없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한 것도 스스로에 대한 다짐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임기 마지막 날 오후까지 일했다. 국민들도 일에 대한 열정은 인정하는 듯하다. 집권 3년차 지지율이 40%대를 유지하는 것도 이런 기대감을 반영한 수치다. 8월25일이면 임기가 반환점에 이른다. 그동안의 약속들을 점검해서 지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을 구분하고, 지키지 못했다면 최소한 공식적인 사과라도 했으면 좋겠다.

남도영 정치부 차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