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걷는다, 413년 전 충무공 발길 따라… 하동∼산청∼진주 ‘이순신 백의종군로’
입력 2010-08-18 18:06
1597년 4월 초하룻날에 의금부에서 풀려난 충무공 이순신은 5월 26일 비에 흠뻑 젖은 채 경남 하동 악양면 평사리의 이정란 집에 도착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7월 10일로 장마철이었다. 왜적의 총칼에 짓밟힌 백의민족의 피눈물인양 굵은 장맛비가 섬진강과 지리산에 쏟아졌다.
그로부터 4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정란의 집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충무공이 하동에서 첫 밤을 보낸 이정란의 집 앞은 척박한 논밭과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무딤이들. 아이러니컬하게도 무딤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둑을 쌓아 문전옥답으로 바뀌면서 박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으로 유명한 악양들판으로 거듭났다.
이튿날 저녁나절에 길을 떠난 충무공은 재첩 채취가 한창인 섬진강변(현 19번국도)을 걸어 두치(하동읍 두곡리)의 최춘룡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최춘룡의 집도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이순신은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는 도중에 최춘룡의 집을 찾는다.
충무공은 5월 28일부터 이틀 동안 하동읍성의 현청에서 유숙했다. 양경산성으로 불리는 하동읍성은 조선 태종17년(1417)에 축성한 1400m 길이의 산성. ‘이순신 백의종군로’ 표지석이 위치한 주성마을회관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빛의 터널인 대나무 숲을 통과하면 능선을 따라 허물어진 산성이 방초 속에 묻혀있다.
하동 문암마을과 진주 원계마을을 연결하는 문암교는 강폭을 한껏 늘린 덕천강을 가로지른다. 충무공이 백의종군 할 때 두 차례나 쉬어갔던 강정(문암정)은 문암교 서단의 도로변에 위치한 정자. 충무공을 비롯해 수많은 문현들의 자취가 서려있는 강정에 오르면 덕천강 너머 진주 원계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진주 수곡면 원계마을의 손경례 고택은 충무공이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유숙하면서 군사를 훈련했던 곳. 난중일기는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고하고 말을 달렸는데 원수가 보낸 군대는 모두 말도 없고 활에 화살도 없으니 소용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군사를 훈련했던 진배미들에는 1975년에 세운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가 비닐하우스 사이에 세워져 있다.
집터는 그대로지만 집은 몇 차례 고쳐지은 손경례 고택은 충무공의 백의종군이 종료된 역사적 현장. 7월 15∼16일 벌어진 칠천량해전에서 충무공을 모함했던 원균이 전사하고 조선수군이 대패하자 놀란 선조는 22일 충무공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충무공은 열흘 후인 8월 3일 손경례 고택에서 재수임 교서를 받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린다. 한옥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허름한 가옥의 처마 아래에는 이순신장군의 빛바랜 영정이 걸려있고 사랑채 앞에는 1965년에 세운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기념비’가 쓸쓸하게 빈집을 지키고 있다. 마을 입구에 뿌리를 내린 수령 600년의 도나무 한 그루는 그날을 감격을 지켜본 유일한 생명이지만 고사 직전이라 안타까움을 더한다.
하동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백의종군로 산길 구간은 손경례 고택과 가까운 산청 단성면 창촌리 금만마을에서 시작된다. 금만마을에서 남사예담촌까지는 약 5㎞. 시멘트로 포장한 농로가 끝나자 백의종군로는 부드러운 흙길로 바뀐다. 길섶에서는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길손을 유혹한다. 이따금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릴 뿐 산길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즈넉하다.
1001번지방도를 가로지른 백의종군로는 길리마을과 송덕사라는 조금만 암자를 지나쳐 다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밤나무 터널을 빠져나온 백의종군로는 남사제라는 작은 저수지를 만난다. 저수지 주변은 하얀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허수아비들이 인적 없는 논을 지키고 있다. 남사제를 지나면 무성하게 자란 풀 때문에 길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이내 남사예담촌을 벗한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남사예담촌은 경남의 하회마을로 불리는 한옥마을이다. 남사예담촌의 ‘예담’은 예스런 담이란 뜻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의 돌담은 약 3.2km나 이어진다. 사양정사, 이사재, 최씨고가, 이씨고가 등 고택과 돌담길이 고즈넉한 풍경을 그린다.
6월 1일 해질녘에 남사예담촌에 도착한 충무공은 박호원의 농막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남사예담촌에는 충무공이 묵었던 농막은 없어졌지만 임꺽정의 난을 진압한 박호원의 재실인 이사재가 늠름한 모습으로 남사예담촌을 굽어보고 있다. 충무공은 이튿날 단계천변에서 아침밥을 지어먹고 권율 장군의 도원수 진이 있는 합천으로 향한다.
충무공은 왜 공관을 마다하고 민가에서 머물렀을까. 비록 파직 당했지만 직위해제 상태라 충무공은 말을 타고 7∼8명의 종자를 거느리는 장군 신분이었다. 이에 대해 ‘이순신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해온 경남도 관광진흥과의 김종임씨는 백의종군 처지에 공관에서 유숙하는 게 선조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뿐만이 아니다. 당시 왜군은 충무공을 암살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충무공은 암살도 피하고 왜군의 동태도 살필 목적으로 민가에 유숙했다는 분석이다. 충무공이 민가에 유숙하면서도 반드시 지켰던 원칙은 과부의 집에서는 절대 유숙하지 않았다는 것. 백의종군 중에도 나라와 백성을 지극하게 섬기는 충무공의 충심이 백의종군로 곳곳에 깊게 서려있다.
하동·산청·진주·통영=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