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현종 (9) 식구·친구 몰래 서울로 야반도주

입력 2010-08-18 20:07


전기과를 나왔으니 취직하긴 어렵지 않았다. 생활이 어렵던 식구들은 그걸 바랐다. 취직을 하면 평생 전선줄이나 만지고 라디오 수선이나 하며 결혼하고 그런대로 행복하게 욕심 없이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이름난 작가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문학에 올인해야 했다. 내가 그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친구 하나가 대학입시요강 한 통을 사서 편지로 보내왔다.

대학입시요강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서라벌예술대학이란 학교인데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면제해주는 장학생을 뽑는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시를 잘 쓰든가 소설을 잘 쓰면 장학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흥분을 달랬다. 시가 됐든 소설이 됐든 작품을 쓰는 것이라면 자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스승한테는 상의를 하여 결정할 문제라 생각했다. 중학생 때 도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한국 서정시의 개척자이신 ‘촛불’의 시인 신석정(辛夕汀) 선생님의 사랑과 지도를 받았다.

신 선생님은 전주 노송동에 살고 계셨는데 집안 텃밭에 장미원을 만들어 부업을 삼고 있었다. 나는 해마다 여름방학 때면 스승 댁으로 가서 열흘, 보름 정도 지내다 왔다.

문학지도를 받으러 간 것이지만 알고 보면 장미밭에 일하러 간 셈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물 주어 키우고 둘레 파고 거름 주며 전지하고. 일이 많았다. 물론 그 일 모두 선생님이 하시고 나는 옆에서 거드는 정도이지만 힘든 일이었다. 일만 시키다가 어쩌다 한마디 하신다.

“새벽 물기 머금은 장미들이 소곤대는 말을 들어봐라. 안 들린다고? 들릴 때까지 매일 귀 기울여봐. 언젠가는 들을 수 있을 테니.” 그게 소중한 시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내가 빗나가 부랑자 생활 하는 걸 선생님은 모르고 계셨다. 내가 티를 내지 않아서였다.

스승을 뵙고 상의를 드렸다. 그러자 입시요강을 일별하시더니 가서 공부해 보라 하셨다. 네 실력이면 장학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그러시면서 그 학교에 교수로 있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선생 앞으로 추천서까지 써주셨다.

학교 입학하고서도 그 추천서를 미당 선생께 섣불리 드리지 못했다. 나는 이미 소설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데 뵙게 되면 시를 쓰라 하실 듯해서였다. 미당은 신석정 선생의 고향후배이고 아주 친한 사이였다.

어찌 됐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학한다면 식구들을 버려야 한다. 그게 가장 큰 마음의 바윗돌이었다. 하지만 난 결심했다.

“가자! 서울로!”

결심을 더욱 서두르게 한 것은 이렇게 세월을 보내면 나는 건달, 깡패밖에 못된다는 강박감 때문이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고교 졸업하면 성인 건달 취급을 받게 된다. 그리되면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속에 붙잡히게 된다.

“난 깡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바닥을 떠나지 않으면 결심을 해도 소용없다. 검은 손이 항상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어디에 있든 필요하면 찾아낼 것이다. 때 묻은 이 손을 완전히 씻어내려면 홈그라운드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려야 한다. 가자. 저 넓은 서울에 가버리면 누가 날 찾겠는가.”

집안 식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동생만 불러내어 그동안 모아둔 돈을 주고 생활비에 보태 쓰고 누구든 찾아와도 내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하라 한 뒤 비상금만 들고 한밤중에 서울행 야간열차에 올랐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