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하청’ 문제 풀어야 노동시장 양극화 풀린다
입력 2010-08-17 21:42
대법원 ‘사내하도급=파견’ 판결 이후 노사관계 전망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일부 생산라인에는 서로 다른 회사 로고가 새겨진 조끼를 입은 근로자들이 섞여 작업을 한다. 현대차 정규직 근로자와 사내협력(하도급)업체 근로자가 함께 일하는 ‘혼재 라인’이다. 현대차 노조원은 가끔 신문을 보면서까지 여유롭게 작업하지만 다른 기업소속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힘들게 차체 밑에서 하체 의장작업을 한다.
지난달 22일 이런 방식의 사내하도급은 “도급이 아니라 파견”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이 경우 관련법에 따라 해당 ‘불법’ 파견근로자는 2년이 지나면 원청회사인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근로자가 된다. 현대차 관계자는 “신차종 도입에 따른 라인 조정으로 전환·배치 요인이 생기거나 인원을 줄여야 할 때 사내하도급 근로자가 먼저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사측은 정규직의 고용 경직성 때문에 사내하도급을 늘렸지만 노조도 이런 관행을 묵인하고 편승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사법부 칼을 빼들다=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 판결은 2년 이상 거듭된 고민의 산물”이라며 “정부와 국회가 후속 입법에 나서 양극화 해소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대법원은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으므로 앞으로 유사한 소송에서 사용자 측 패소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 가이드라인도 없이 판례에 의존할 게 아니라 파견과 도급의 명확한 경계를 법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내하도급 근로자의 해고무효, 임금차액 지급 등 집단소송도 봇물을 이룰 전망이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울산공장 사내하청지회는 사내하도급 7000여명 가운데 2년이 지난 경우를 포함해 5000여명이 정규직과의 임금차액 지급청구소송을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상수 지회장은 17일 “원청기업을 대상으로 직접고용(정규직화)을 요구하는 교섭을 요청하고 다음달 중 집단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사내하청지회 조합원 수는 이달 초에 비해 두 배가 늘어 1166명이 됐다.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은 “자동차업종에서 약 5만명, 금속산업 전체 약 10만명이 이번 판결에 따른 구제대상”이라고 추산했다.
◇현대차그룹은 ‘고용 없는 성장’의 표상=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이상호 연구위원은 지난 14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고용 없는 성장 전략을 고수하는 현대차그룹이 신규사업과 인수합병기업 중심으로 사내하도급을 확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에 따르면 2009년 현대차의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이 2002년 대비 각각 25%, 105% 급증한 반면 생산직 종업원의 수는 2만9400명에서 3만1600명으로 7.5% 증가하는 데 그쳤다. 노동자 1인당 매출액은 2000년 3억9300만원에서 2008년 7억5300만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난 반면 고용계수(매출 10억원당 고용인원수)는 2.54명에서 1.33명으로 거의 반으로 줄었다.
특히 현대모비스는 대표적인 사내하도급 공장으로 지적됐다. 이 위원은 “2009년 말 현재 종업원 대비 사내하도급 비율이 기아차 7.89%, 현대차 13.76%인 반면 현대모비스는 43.69%로 전체 종업원 6143명의 절반에 가까운 2684명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대책과 전망=정부는 다음달 초까지 실태조사를 벌여 위법사항에 대해 시정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 권영순 고용평등정책관은 “전문가 사이에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있다는 점은 알고 있다”면서 “그렇지만 상반된 입장이 대립돼 제도 개선을 하려면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용부의 실태조사는 전수조사가 아니고 대상도 제조업에 국한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사내하도급이 노동시장 양극화의 주범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노동연구원 은수미 연구위원은 “제조업도 그렇지만 호텔의 룸메이드, 대형 유통업체의 판매·계산대 직원, 공기업의 청소 용역, 심지어 모텔 등에도 위장 사내하도급이 많은 실정”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합법적 사내 도급의 경우에도 차별과 양극화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면서 “차별시정 절차도 없는 사내하도급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사협의회에 협력업체 노사까지 참여시켜 근로조건을 협의토록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현대차 연간 순이익 2조5000억원의 5%만 쓰면 1만여 사내하도급 근로자와 정규직 간의 임금 차액이 충당되므로 정규직 전환이 당장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대차가 당장 사내하도급 근로자를 정규직화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관계자는 “불법파견 판결은 일부 혼재 라인에만 해당되는 것이므로 선별작업을 거쳐 사내하도급 근로자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공정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파견법 규제 완화 등 고용유연성이 확보된다는 전제 아래 사내하도급과 파견의 구분을 법제화하는 데 찬성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고용부가 사내하도급 문제 해결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처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임항 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