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년이여 황국신민이 되어라’ 책 펴낸 역사학자 정혜경씨
입력 2010-08-17 19:26
일제 강제동원 문제는 피해자가 연인원 600~7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전(全) 민족적인 수난이었지만 이 분야 전문가는 극히 드물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제 전시체제기 연구자 층을 꼽는 데 열 손가락이면 충분하다. 관련 서적도 대중서는 고사하고 연구를 시작하려는 사람을 위한 입문서마저 희귀한 실정이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곰삭은 연구 성과물이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출간됐다.
역사학자 정혜경(50·사진)씨가 최근 펴낸 ‘조선 청년이여 황국 신민이 되어라’(서해문집). 이 책은 남양군도에서 시작해 인도네시아, 사할린, 만주, 시베리아, 일본 본토의 순으로 초점을 이동하며 식민지 조선의 징용 역사를 전반적으로 조명한다. 한반도에서 이들 해외지역으로 조선인들이 끌려가게 된 과정과 실태를 알기 쉽게 설명한, 이 분야 최초의 대중서라고 할만하다.
“지난 2002년 6월에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우류(雨龍)군 호로카나이(幌加內)정에 있는 슈마리나이(朱鞠內)댐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일제 때 이 댐 건설을 위해 조선인들이 3000명이나 끌려와 참혹한 강제노동을 하고 사망자도 많았던 곳인데, 우리 일행이 갔더니 현지 초등학생들이 현장학습을 나와 있더군요. 아이들은 예쁜 꽃길을 소풍 나온 듯이 다니면서 해맑은 얼굴로 ‘발전소가 지역에 미치는 영향’ 같은 걸 배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서 어디로 도망도 가지 못 하고 암담한 생활을 했던 조선인들이 있었는데….가슴이 아팠습니다.”
정씨는 그런 가슴 아픈 현장과 사연들을 이 책에서 폭 넓게 소개하고 있다. 기존 역사서나 학술서가 대개 일본 본토에 대한 부분만 단편적으로 다룬데 비해 이 책은 최대한으로 팽창돼 있던 시기의 일본 제국 전체를 조망한다. 그래서 동아시아 전체 민중이 겪었던 수난사 속에서 조선 민중의 아픔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과거에 연연하자는 게 아니다.
“이런 사실을 알린다는 것은 단지 일본을 규탄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역사란 거울과 같은 것이니, 우리의 거울을 잘 닦아서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그러나 일본 우익은 물론 한국에서도 “식민지가 된 덕분에 근대화를 이뤄 잘살게 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지원병이나 징용자, 심지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서도 “자기 발로 걸어갔고 임금도 받았다는데 그게 뭐가 강제냐? 그냥 돈 벌러 간 것이지”라고 공개적으로 떠들곤 한다. “국제자유노동시장의 흐름에 의거한 인구이동”이라는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 서울대 교수의 주장도 있었다. 이런 얼빠진 주장들에 대해 정씨는 당시 조선에 살았던 사람들이 ‘철사 줄에 꽁꽁 묶여 질질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그게 왜 강제동원일 수밖에 없는지를 당시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체제와 공권력 시스템 등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이 책은 객관성을 이유로 건조한 서술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감수성과 상념, 민족의식과 보편적 휴머니즘이 문장 여기저기에 배어 책의 무거운 주제를 인간적 호흡으로 살아 숨쉬게 한다. 그리고 가족의 유골을 찾아 지금도 헤매는 유족들 이야기를 통해 강제동원 문제가 ‘과거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점도 일깨운다.
일본 측의 역사왜곡에 대한 분노와 함께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는 정부 위원회 활동을 하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팔아먹는 인간의 사악함’과 ‘바닥을 썩게 하고 뭉글뭉글 증식하며 카펫을 못 쓰게 만드는 곰팡이’ 부류 속에서 적잖이 속앓이를 해왔다.
“우리가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100주년으로 끝내자’ ‘올해로 다 털자’ 그런 게 아니고 올해가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는 평화운동으로 나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예컨대 스포츠에서 쓰는 용병(傭兵)이라는 단어, 천안함 사건에서 많이 쓰인 산화(散華)라는 말, 추모나 추도가 아닌 위령(慰靈)이라는 표현과 같이 일제 및 국가신도와 관련이 깊은 전쟁용어는 쓰지 않는 사회적 절제가 필요합니다. 평화지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용어를 쓰는 것도 작은 실천이에요.”
정씨는 용어 문제 중에서도 특히 정신대(挺身隊)라는 표현이 오용되고 있음을 강하게 지적한다. 원래 정신대는 ‘온몸을 바치는 집단’이라는 의미로 자원봉사나 의용대를 일컫는 단어다. 따라서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각종 근로정신대의 이름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2차 대전 때 일본 외에 독일이나 영국, 미국에서도 여성을 군수공장에 동원한 사례가 많다.
그런데 1990년대에 국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제기되면서 해당 피해자들을 ‘정신대 할머니’라고 통칭하고 단체 이름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나 ‘한국정신대연구소’ 등으로 사용해 일반인들은 정신대를 위안부와 혼동하게 됐다. 그 결과 여자근로정신대가 일반 노동력 동원 대상자였음에도 괜한 오해를 받게 됐고, 나아가 새로운 인권 침해를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가족들이나 사회에서 오해를 받아 매우 어려운 상황을 겪기도 하고 배우자에 의해 “일본에서 몇 놈이나 상대했느냐”며 이혼을 당하거나 지속적인 폭행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았다.
정씨가 사례를 구구절절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근로정신대 문제에 웬만큼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다. 예컨대 ‘99엔 사건’으로 유명한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그리고 후지코시 군수공장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가령 이렇다.
“애들 셋 낳고 살다 어디서 소문들 들었던 모양이더라. 집 나가 소식도 없다가 8년만인가 어디서 머슴애 셋을 데리고 들어왔더라…어찌된 일이냐고 했더니 성질부터 내더라. ‘내가 바람 좀 피워다고 해서 뭐가 문제냐. 일본에 가서 몸 판 너보다야 낫지 않느냐’고….”(양금덕·82)
“군인으로 갔다가 돈 못 받아서 우리랑 같이 데모하는 빼빼 마른 할아버지도 아직까지 우리를 위안부라고 해요. 그러니 남들은 위안부로 인식 안 하겠어요?(울음) 35세 때 이혼했어요. 전 남편은 ‘일본 가서 뭐 했느냐. 몇 사람을 상대했느냐’며 때렸어요. 재혼할 생각 없어요. 누가 이북 사람을 중신해준다고 했는데 싫다고 했어요. 아이코, 나 또 버림 받으라고.”(김정주·79)
심지어 의식 있고 명망 있는 사학자들도 근로정신대와 군 위안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역사학자 이이화가 한길사에서 펴낸 한국사 이야기 시리즈 21권 ‘해방 그날이 오면’ 276~277페이지에는 ‘일본 군인의 노리개가 된 정신대’ 편이 있다. 일본에 끌려간 근로정신대 소녀들이 신사참배를 위해 행진하는 사진을 싣고 “일제는 전선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성 욕구를 채울 대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본 육군은 처음에는 일본의 창녀들을 데리고 갔으나…”라고 기술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정씨는 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광복을 이룬 조국에서 살아간 지 수십 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손가락질 당하는 기현상이 계속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그대로 두어야 할까요. 정녕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럴 뿐입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국에서 현재 활동하는 관련 단체들의 이름부터 바꾸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인권을 위해서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한다는 입장에서도 용어는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더구나 강제동원 피해와 관련한 단체라면 말할 나위가 없지요. 아무리 수십 년간 이어온 단체의 이름이 중요하다 해도 인권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근대사 가운데 재일한인의 역사를 전공한 정씨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에서 조사2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위원회 출범 때부터 참여해 실무 지휘자로 5년간 잔뼈가 굵어 이론과 현장을 겸비한 최고 수준의 연구자로 꼽힌다.
특히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구술을 기록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처음으로 체계화해 관련 연구사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한국구술사연구회, ‘구술사:방법과 사례’, 선인).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