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08-17 17:39


(7) 고립의 은혜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



하나님이 사람을 훈련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고립이다. 고립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어떤 지역에 일정기간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성경의 사람들은 자주 고립되어 살았다. 야곱이 그랬고 요셉이 그랬다. 세례요한이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다. 엘리야는 핍절의 시대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릿 시냇가에 혼자 떨어져 살았다. ‘그릿’은 ‘단절되다’는 뜻이다. 그는 사방으로 단절된 외로운 시냇가에서 까마귀와 벗하며 살았다. 고립은 지리적으로 격리되고 정신적으로 단절된 것이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를 사랑한다. 시편 68편 6절에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고 했다. 여기에 나오는 ‘고독한 자’의 헬라어 ‘모나코스’는 훗날 수도원 운동(monasticism)의 어원이 되었다.

고립에는 강제적 고립도 있지만 자발적 고립도 있다. 자발적 고립의 대표적인 분이 예수님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주 자신을 고립시켰다. 마귀와 싸우기 위해 40일을 광야에 계시기도 하고 제자를 삼기 위해 광야에서 하룻밤을 새우기도 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신 뒤에는 사람들을 떠나 빈들로 나가셨고 나병환자를 고친 뒤에는 스스로 물러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눅5:16). 이러한 자발적 고립의 은혜를 역사적으로 구체화한 운동이 수도원 운동이다.

수도원 운동의 특징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이집트의 안토니다. 안토니는 주후 252년 이집트에서 출생했다. 만 18세에 부모를 잃었을 때 부모는 그에게 많은 재산을 남겼다. 어느 날 마태복음 19장 21절을 읽다가 그가 은혜를 받았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는 말씀대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준 후 집을 떠났다. 처음 15년은 도시 변두리에 있던 지하묘지에서 살았고 기도가 깊어지면서 점점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일강에서 100마일이나 떨어진 폐허가 된 성채에서 20년을 기도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멀리 시내산이 보이는 ‘콜짐’이라는 곳에서 평생 기도하다 하나님께 갔다.

안토니가 보여준 분리의 삶은 성경이 말하는 고립의 은혜를 영적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의 본질은 공간적 분리에 있지 않다. 지리적 분리보다 마음의 분리가 더 중요하다. 바쁜 일과를 사는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으로 갈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도원 제도가 아니라 수도원 정신이다.

수도원 정신의 핵심은 내면적 분리다. 세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는 것, 예수님의 말씀대로 “은밀한 마음의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평생을 기도실에서 기도하며 산 수도자 맘마 신크레티카라가 말했다. “산에 살면서도 도시 사람처럼 세월을 허송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군중 속에 살면서도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칩거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내면의 집에서 스스로 자신을 분리하여 매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수도원이다.

이윤재 목사<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