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조용래] 일본은 왜 ‘사죄’ 표현에 인색할까

입력 2010-08-16 17:43


일본말은 참 쉽다. 우리말과 어순이 같고 조사활용까지 비슷한 데다 공유하는 한자말도 많은 덕분이다. 하지만 요리조리 돌려서 말하는 일본어 특유의 표현을 마주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예컨대 ‘너를 좋아해’는 보통 ‘너의 것(아나타노 고토)을 좋아해’라고 말한다. ‘아나타노 고토’는 상대의 일 생각 모습 품성 등을 모두 담고 있다. 상대의 존재 자체보다 풍겨나는 아우라(aura)를 좋아한다는 식의 간접 표현이다. 존재보다 분위기를 중시한다는 걸까.

수없는 이중부정의 말꼬리 표현도 우리를 지치게 한다.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운운. 여기에 지나친 겸양·존칭 표현까지 끼어들면 힘이 빠질 수밖에. 외교적인 수사로는 어떨지 몰라도 말하는 이의 속내를 읽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이런 애매모호한 일본어 표현 때문에 한·일 관계가 안착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라는 한국과 이미 사죄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늘 반복되는 게 특히 그렇다. 이는 지난 10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 담화 ‘한국병합 100년’에서도 드러난다.

애매모호한 세 日총리 담화

간 총리는 과거사 반성과 관련해 “새삼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 사과(오와비)의 심정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 표현은 1995년 전후 50년을 맞아 나온 무라야먀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 담화와, 2005년 전후 60주년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담화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선 무엇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느냐는 것이다. 세 담화는 모두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식민지 지배가 야기한 다대한 손실과 고통에 대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고통을 가한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 전형적인 일본식 표현 때문이었을까.

또 하나는 ‘오와비’의 뜻이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들은 ‘사죄’라고 번역했으나 과연 ‘오와비=사죄’인가. 일본어사전 ‘고지엔(廣辭苑)’은 ‘오와비’를 “곤혹스러움을 나타내면서 과실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사과’ ‘사죄’와 같은 뜻이라고 설명한다.

‘오와비=사죄’라면 일본은 왜 ‘사죄’ 대신 ‘오와비’로 표현했을까. 몇몇 일본 언론의 서울특파원들에게 물어봤다. 그 두 단어는 기본적으로 같은 뜻이나 ‘사죄’가 형식적이고 딱딱한 뉘앙스를 준다면 ‘오와비’에는 사과하는 마음(심정)이 담긴 것이라고 답한다.

‘오와비’에는 인간의 체온과 마음이 실려 있는 표현이라는 것인데 참담한 침략의 역사에 대한 사죄를 놓고 마음이나 정서를 중시하는 식의 언어구사를 한다는 게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혹 일본은 ‘사죄(謝罪)’에 든 ‘죄’라는 글자를 가급적 기피하려는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고통을 가했던 주체를 애매하게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1967년 ‘전쟁책임고백’ 주목을

그런데 지난 1967년 부활주일 일본기독교교단 스즈키 마사히사(鈴木正久) 총회장이 발표한 ‘전쟁책임고백’에는 분명하게 일본의 ‘죄’를 거론하고 있다. 그 선언문의 일부는 이렇다.

“교회는 그 전쟁에 동조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조국이 죄를 범했을 때 우리 교회 또한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파수꾼’의 사명을 소홀히 했습니다. 마음 속 깊이 이 죄를 참회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빕니다. 더불어 세계,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그리고 그곳에 있는 교회와 형제자매, 또 국내의 우리 동포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구합니다.”

선언문엔 ‘오와비’란 표현은 없었지만 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 단순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선언문과 세 담화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애매모호한 담화 표현은 결코 일본말의 특성에서 비롯된 게 아닌 셈이다.

최근 일본이 과거를 직시하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은 분명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 인식은 여전히 얕고 자기중심적이다. 일본과의 전후청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모양이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