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경자] 낯선 사람이 반가웠으면

입력 2010-08-16 17:45


“범죄자에게 형벌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행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

딸만 둘을 길렀다. 아이들이 제법 여자 꼴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괴한에게, 버스에서 아저씨가, 아파트의 경비실에서, 방안에서 의붓아버지와 사촌오빠가, 학교에서 선생님이…이렇게 저렇게 성추행을 하고 성폭행을 했다는 보도와 소문을 들었을 때, 실제로 이웃에서 그런 사실을 목격하는 동안 어미인 내 마음은 불안으로 졸아들고 타들어 갔다.

어서 아이들이 컸으면,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생겼으면 하고 바라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체력적으로 방어의 능력을 기른들 남자를 당하랴. 게다가 24시간 딸들을 지킬 수는 없고, 그렇게 지켜야 하는 세상이라는 걸 아이들이 알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혐오하게 되는 건 정말 불행 중에 불행일 테니.

하지만 아이들이 어렸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섯 살 미취학 어린이로부터 할머니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여성 일반에 대한 성폭력은 때와 장소가 따로 없다.



오래 전 초등학교와 중학생인 딸들에게 성희롱이나 성폭력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면서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손금을 봐준다고 한다, 엉덩이가 복스럽다고 만진다, 어깨동무를 한다, 브래지어의 끝을 잡아당긴다, 뽀뽀를 한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 건 다 성희롱이다, 라고 말할 때, 마음이 서늘해졌다. 혹시 아이들이 그런 말을 해서 선생님의 미움을 사면 어쩌나, 그리고 남성 일반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이 내면화되면 어쩌나 가지가지 근심이 컸다.

내가 어릴 때 집과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의 요체는 ‘남자는 모두 늑대다’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지금 같은 포악한 성범죄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성교육이 남성관계에 미치는 불건강함과 부정적 이미지는 결국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병리적으로 확대시켰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즈음 여성의 경제력이나 성적 결정권 따위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때에 여성에 대한 범죄의 포악스러움이 극에 달한 것 같다. 아동에 대한 성추행과 성폭행은 물론 여성만을 골라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범죄가 늘었다. 범인이 진술한 범행동기 중엔 무조건 ‘여자가 싫다’는 이유도 있었다. 개별적으로 이성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살해의 욕구와 실천으로까지 나가는 건 큰 문제다.

정부에선 전자발찌를 채우고 명단을 공개하고 심지어 성적 욕구를 저하시키는 화학적 방법까지 고려한단다. 그 보도를 보는 순간 여자인 나, 딸만 가진 나는 불안하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범죄 경력을 가진 반사회적인 남성을 격리하고 소외시키면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의문이다. 남성의 성범죄는 예측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결국은 여성으로 하여금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꾼으로 느끼게 한다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야 할 때, 늦은 밤 택시를 타려고 할 때, 지나치게 친절한 선생님, 아저씨, 친인척 남성들을 경계해야 하는 여성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을까? 반대로 여성이 나를 경계할지 모른다고 지레 자신을 검열해야 하는 남성은 어떤가. 이래저래 서로 조화를 이루고 사랑해야 할 양성의 관계는 불신과 피해의식으로 골병든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모르는 사람의 친절을 의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부모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면 문을 열어주지 말고, 먹을 것을 주어도 받아먹지 못하게 가르친다. 친절을 베풀다가 상대로부터 경계의 시선을 보았을 때, 나는 섭섭함을 넘어 두려움을 느낀 적이 많다.

그러나 성범죄자에 대한 극단적이고 가학적인 처벌이 잠재적 피해자로 하여금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범죄의 발본색원은 범죄자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려 형벌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알고 병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게 훌륭한 의사’라는 의성(醫聖) 화타의 말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이경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