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개척, 김용기 선교사
입력 2010-08-16 20:41
1997년 알바니아 내전 상황. 수도 티라나 시가지의 미국 대사관 옆을 지날 무렵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총격전이 벌어졌다. 치열한 시가전 중심에 한국인 가족이 있었다. 부부와 4세 여자 아이, 두 달 된 남자 아기였다. 이가 떨리고 무릎이 꺾일 정도의 공포였다. 부부는 양측의 사격에서 흐르는 유탄을 피하기 위해 빌딩 벽에 몸을 바짝 기댄 채 간절히 기도했다. 갑자기 흰색 벤츠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후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를 지나던 알바니아 주민의 차였다. “여기서 뭐해요. 빨리 타요.”
동유럽의 발칸반도에 위치한 알바니아공화국에서 활동 중인 김용기(46·사진) 선교사가 겪은 일화다. 원래 파키스탄에 가려고 했다. 3년여를 준비했던 터였다. 하지만 지난 94년 그가 속한 단체에서 계획을 수정했다. 오랜 이슬람의 영향 아래 있다가 공산주의 국가로, 다시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한 알바니아를 추천했다. 파키스탄도 선교사가 많지 않았지만 알바니아는 나라 이름조차 생소했다.
정말 아무 준비도 못했다. 알바니아어는 너무 어려웠다. 김 선교사는 1년을 매일 밤 아내와 함께 알바니아 말이 들리도록 기도했다. 알바니아는 나쁜 별명이 많은 나라였다. 유럽의 천덕꾸러기, 벙커의 나라, 정전의 나라 그리고 김 선교사에겐 ‘언어가 어려운 나라’였다.
하지만 1년여 기도 후 은퇴한 알바니아 국어교사가 친구가 됐다. 거짓말처럼 알바니아어에 능통하게 됐다.
국기원 해외특별자문위원 자격으로 알바니아와 인근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등에서 태권도 자문역할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지금은 티라나 쉬프레사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얼마 전엔 마케도니아와 코소보에 알바니아 현지인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는 현지인 선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신의 고백이기도 했다. 그는 “선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다”며 “얼마나 현지인들 속에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알바니아는 1479년 오스만튀르크령이 되었다가 1908∼1912년 범민족적 독립운동의 결과로 1912년 11월 독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국가가 됐지만 92년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로마서 15장 19절에 등장하는 일루리곤이 알바니아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곳이기도 하다.
알바니아의 본격적 선교 물결은 민주화가 되면서부터. 서구 선교사들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사도 바울 이후 선교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현재 서구 출신 300명의 선교사들이 활동 중이며 한국인 선교사는 20가정이 사역하고 있다. 알바니아는 이슬람교와 정교회 외에는 모두 이단으로 취급한다. 현재 개신교인은 2만명, 교회는 200개 정도로 추정된다.
알바니아는 380만명 인구의 70%가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지만 선교의 문은 열려 있는 독특한 나라다. 무슬림이 많다고 선교의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것이다. 김 선교사에 따르면 절대 다수의 무슬림이 온건한 사람들이며 친절하고 손님 대접에 익숙한 ‘선한 사람들’이다. 김 선교사는 “무슬림을 적대시해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며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자 이웃으로 생각해야 선교가 가능하다”고 했다.
최근 일본 코스타 강사로 참여한 김 선교사는 청년들에게 기도를 강조했다. “기도는 주님과의 연합이지 무엇을 달라고 떼쓰는 요청이 아닙니다. 주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이나(일본)=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