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전 광복공간에서의 한국기독교가 주는 교훈
입력 2010-08-15 19:09
“위기마다 민족섬김 앞장… 희망의 빛 발하자”
65년 전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오늘에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 도도하게 흐르는 한국교회 역사는 세속화와 좌우의 편향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족의 희망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교회를 두려워하다?=현재 중·고등학생이 사용하는 ‘국사’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독립운동의 주체가 애국시민으로 두루뭉술하게 포장돼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당시 교회는 봉건적인 구습과 계급을 타파하며 민주·평등의식을 고취시키고 성경 보급을 통해 한글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기독교인은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활동, 105인 사건, 3·1운동, 농촌운동과 절제운동 등을 통해 인간존엄과 계몽운동을 벌이며 민족해방의 주체세력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조선총독부 간 문제는 정교갈등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러나 황국신민화 정책 이후 일제는 한국교회의 탄압과 회유를 위해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1940년)과 같은 억압정책을 내놓았다. 교회 내 일장기 게양탑 설치, 야소교 교역자 좌담회 개최, 설교·기도문 검열,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며 강력한 통제정책을 실시했으며, 그 결과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는 굴절의 역사를 보였다.
이처럼 일제가 교회를 타깃으로 한 것은 정치·문화·종교적 이데올로기 면에서 기독교와 공존하기 힘들었고 교회가 가장 큰 반일 세력이었다. 또한 선교사들을 매개로 미·영 강대국과 세계 여론과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준국교의 위치까지 오르다=해방 후 남한 교회는 미군의 진주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됐으며, 외래·소수종교에 불과했던 신세에서 준국교의 위치까지 격상된다. 미군정 아래 고위 관리에 임용된 이들은 신앙을 지니고 영어에 능통한 숭실전문과 연희전문, 세브란스 의학전문 등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거나 교수로 활동한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교인은 인구 대비 0.5% 미만에 불과했지만 장·차관의 3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고 미군정에 의해 임명된 행정 고문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지정됐고 1948년 5월 열린 초대국회에선 모든 의원이 기립한 채 기도로 시작했다.
교회는 기독교세계봉사회와 감리교 해외구제위원회 등 해외 구호단체에서 오는 막대한 구호품이 유입되고 배분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으며, 성경구락부 재건 등 교육, 의료, 복지 등 사회사업 확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방 후 종교 전시장이 될 정도로 종교 자유가 확대된 한반도에는 남침례교와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했다.
그러나 친일 교단인사들의 복귀와 함께 신사참배 문제가 불거졌고, 이후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사상은 결국 교파 분열로 나타났다. 그리고 몇 년 뒤 6·25라는 민족 분단의 고통을 겪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는 “65년 전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처럼 해방의 감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의 덕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신앙인은 반드시 과거의 고난과 시련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 교수는 “그러나 이데올로기로 민족이 갈라지고 신학과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5년 뒤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라며 “이런 역사적 사실을 깨닫고 교회가 먼저 이해와 용서로 하나 되는 해방의 감격을 되찾아야 조국과 세계를 위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