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0-08-15 17:42


(7) 복음의 시작

선배한테 물었다. “선배, 마가복음 1장 1절에 ‘복음의 시작’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마가복음 전체가 복음이고 1장이 그 시작이라는 얘기가 아닌 거죠? 마가복음 맨 마지막 장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16장 15절인데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20절에, 그러니까 마가복음 맨 끝인데,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하면서 마칩디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복음의 시작이란 게 마가복음 전체가 시작인 거고, 시작에 이어지는 행동 개시는 마가복음 맨 끝에서 비로소 발동이 걸리는 것이 되는 거죠. 영화감독이 촬영을 할 때 ‘액션!’ 하고 말하는 게 마가복음 맨 끝에 있는 게 되는 거고요….”

삼청동 찻집에서였다. 선배는 턱을 괴고 내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선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선배가 내 말을 자른다. “빙고! 야, 너 신학자 다 됐구나. 너 마가복음을 진짜 진지하게 읽었구나. 네 말이 맞아. 마가복음은 그래서 맨 끝에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거야. 마가복음이 말하는 예수는 삶으로 복음을 전한 분이야. 그래서 사람들에게 복음의 지식을 주신 게 아니고 복음으로 살라고 요청하는 분이지. 마가복음은 16개 장 전체에서 예수가 걸어간 그 길을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들도 같이 걸으라고 요청하는 책이지. 사실, 난 말이야 이걸 생각할 때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게 얼마나 절실한지 마음이 절절한데, 그러니까, 복음은 사실 불편하다는 거야.

자 생각해 봐라.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는 결코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야. 복음은 사람들에게 ‘살라’고 요청하지. 그 삶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거야. 그러면 뭐야, 변화하라는 말이잖아! 삶은 언제나 변하는 거야.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변하지. 시간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그래. 변하는 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 나쁜 쪽으로 변하는 것. 일반적인 우리말 어감으로 보면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게 변화고 나쁜 쪽으로 변하는 건 변질이야. 마가복음의 예수는 사람들에게 변화돼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는 거지. 그 요청이 결코 만만치 않아. 예수가 전하는 게 강의나 강연이 아니라서 그래. 오늘날의 신앙생활로 말하면 예수가 전하는 방식이 설교인데, 설교는 삶으로 하는 거야. 그러니까 봐라, 이런 거야. 예수가 지상에서 걸어간 길이 복음의 길이야. 그 길은 쉽지 않았지. 고난이 있었다는 말이야. 그러나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어.

이런 말 들어봤니,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야. 그게 예수가 걸어간 길인데,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이 길을 걸으라고 요청하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걸어온 자기 길에서 노선을 바꾸어 예수가 걸어간 길로 들어서는 것, 이게 변화의 시작이야. 복음적 삶이라고 부르는 게 바로 이거지.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이 더 이상 할 일이 없도록 모든 것을 다 이루지 않았어. 다만 샘플을 보여준 거야. 그리고 자신의 지상 생애 마지막을 제자들의 복음적 삶으로 이어지게 하신 거지.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바로 이 점을 얘기한 거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