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아들이 기억하는 ‘건국포장’ 故 송두용 선생… “한센병 환자 안방에 재우고 함께 식사”

입력 2010-08-13 18:16


12일 경기도 안산에서 만난 송석준(72)씨는 어릴 적 아버지를 미워했다고 했다. 어린 송씨의 눈에 아버지는 남을 챙기느라 가족은 뒷전인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한겨울 길에서 죽어가는 노파를 데려와 안방에 누이는 바람에 어린 8남매는 차가운 방에서 잠을 설쳤다. 고아와 전과자를 가리지 않고 거둬 한 식구처럼 살았고 누런 고름이 흐르는 한센병 환자들과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아이가 싸우면 부모는 제 자식 편을 든다는데 아버지는 반대였다. 많던 재산을 한 푼도 자식에게 남기지 않았다.

송씨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글로 식민통치를 비판하다 옥고를 치른 송두용(1904∼1986) 선생이다. 계몽운동가 김교신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활동했고 평생 성경 말씀을 전하고 이웃을 돌보는 데 힘썼지만 송두용을 아는 사람은 적다. 아버지는 성경대로 사는 것밖에 몰랐다고 송씨는 전했다.



◇입교(入敎)=1925년 5월 청년 송두용은 일본 도쿄농업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일본인 하숙집 주인이 성서 강연을 들으러 가자고 했다. 그는 송두용이 일본에서 처음 유학했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사태 때 조선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었다.

도쿄 시내 한 강당에서 일본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강조했다. 그는 일왕 숭배 및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통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교회는 신사참배와 전쟁을 옹호하고 있었다. 불교 집안에서 자란 송두용은 그날 기독교인이 됐다.

이듬해 우치무라의 강연회에서 송두용은 조선인을 찾아다녔다. 도쿄고등사범학교 학생이던 함석헌 등 6명을 차례로 만났다. 이들은 1927년 7월 기독교 월간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했다.

◇실천=1929년 8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송두용은 이듬해 9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오류리(현 서울 오류동)에 정착했다. 전공을 살려 개량 농법을 전수하고 전도와 교육에 전념했다. 12월 오류학원을 세우고 낮엔 아이들, 밤엔 어른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서울 오류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송두용의 집은 늘 외부인으로 북적였다. 송두용은 후원하는 고아원에서 성품이 거친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훈육했다. 어느 날 길에서 데려온 여자 아이는 산발에 이가 많고 몸에서 독한 냄새가 났다. 송두용은 자신을 찾아온 한센병 환자들을 안방에서 재우고 함께 식사했다. 밤새 간병하던 거지 노파가 죽자 직접 장례를 치렀다. 일요일에는 예배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송두용은 부잣집 외아들이었지만 재산에 욕심이 없었다. 1937년 자신의 땅을 조선총독부가 염가로 정한 고시가격으로 농민들에게 처분했다. 시세의 절반도 안됐다. 남은 재산은 교육과 전도에 썼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펴 다시 썼고, 땅바닥에 떨어진 고추를 물에 씻어 아내에게 줬다. 주걱과 밥통을 씻다 하수구에 버려진 밥알을 우물물에 씻어 몸종 앞에서 말없이 먹었다.

◇필화=1942년 3월 성서조선 주필이던 김교신이 ‘조와(弔蛙·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라는 글을 실었다. 겨울이 지난 골짜기에서 몇 마리 개구리를 발견하고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며 감탄하는 내용이다. 엄혹한 식민통치를 견뎌낸 조선인의 강한 생명력을 암시했다. 일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송두용 김교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독자까지 조사를 받았고 성서조선은 폐간됐다.

성서조선의 글은 처음부터 구절구절이 일제에 쓰라렸다. 송두용은 1928년 1월호에서 ‘그들에게 참 것은 하나도 없으며 필연의 결실인 실망 낙담 패배 멸망 사망을 거둘 뿐’이라고 썼다. 1928년 4월호에 게재한 ‘현세는 풀무이다’에서 ‘풀무 속에서만 세력을 가진 불탱이(탐욕스럽고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쓴 구절은 조선을 압제하는 일제를 꼬집은 것이었다.

◇평가=광복 후 송두용은 전도와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 서울에 올라오면 집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소매를 걷어붙이고 서울역 대합실과 공중변소를 청소했다. 지인들이 경인 지역 초대 국회의원 출마를 여러 번 권했지만 송두용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숨어살았다.

김교신은 생전에 “(송두용은) 주위에 냉수 한잔을 떠주기에 정성을 다했다”며 우직하고 한결같은 송두용의 신앙을 ‘멧돼지’에 비유했다. 다른 데 한눈팔거나 타협하지 않고 성경대로만 살려고 했다는 뜻이다. 함석헌은 1975년 송두용의 입교 50주년 기념회에서 “세상에서는 나를 다섯 번 변했다고 하는데 송두용의 신앙은 초지일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성서조선 동인 6명 가운데 송두용만 광복 이후에도 ‘영단’ ‘숨은살림’ ‘성서인생’ ‘성서신애’ 등 신앙 잡지를 펴냈다. 성서신애는 지금도 발행 중이다.

이제 송두용의 넷째 아들 석준씨는 어린 시절 원망했던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 그는 15일 아버지를 대신해 건국포장을 받는다. 그는 “어지럽던 시절 이웃을 제 몸처럼 돌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 비로소 이해하겠다”고 말했다.

안산=글·사진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