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뮐러 낱말 보따리가 열린다

입력 2010-08-13 17:36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르타 뮐러(57)는 1987년 루마니아에서 서독으로 망명할 때 ‘낱말상자’를 들고 왔다고 한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잡지 속에서 흥미 있는 단어들을 가위로 오려내 책상 위에 진열해 놓고 그 낱말들을 사용해 문장을 만드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거의 중독 수준이라고 밝힌 언어 조탁에의 지향은 뮐러의 문체적 특징을 가져왔다. 53년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는 루마니아 바나트 지역 니츠키도르프에서 태어난 그는 망명 이후 독일 태생이 아니면서 독일어로 글을 쓰는 작가의 작품을 통칭하는 ‘제5의 독일문학’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는 그가 독일과 루마니아 두 문화 가운데 어디에도 편입되거나 동화되지 못한 이방인 같은 존재라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고통스런 일상을 견뎌낸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고향을 잃은 자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국제비교문학학회 초청으로 ‘2010 세계비교문학대회’ 참가 차 15일 입국하는 뮐러의 방한에 맞춰 대표작 세 편이 나란히 번역되어 나왔다. 지난 4월 출간된 ‘숨그네’ ‘저지대’에 이어 국내 저작권자인 문학동네가 선보인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마음짐승’이 그것이다. 이들 소설들에서도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특유의 언어 조탁으로 버무려지는데 전후 전체주의의 공포를 고발한 작품들이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윤시향 옮김)는 원래 슈테레 굴레아 감독의 영화 ‘여우 사냥꾼’의 기초 자료로 쓰였다가 소설로 개작되었다. 뮐러가 공장에 취직해 번역사로 일하던 시절 비밀경찰의 스파이 제의를 거부했다가 온갖 고초를 겪고 해고된 것처럼, 소설 속 여교사 아디나도 비밀경찰에 주의할 인물로 찍혀 위협받는다. 33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각 에피소드는 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오버랩을 통해 연결되는데 시점도 소설 도입부에서 죽은 파리를 나르는 개미에 대한 묘사같은 클로즈업과 도시 변두리의 삶에 대한 서술같은 롱숏을 오간다.

“개미 대가리는 핀처럼 뾰족해서 태양은 빛을 내려 쏠 자리를 찾지 못한다. 태양이 작열한다. 개미는 길을 잃는다. 개미는 기어가고 있지만 살아 있지 않다. 눈으로 볼 때 개미는 동물이 아니다. 잔디깍지벌레들도 개미처럼 도시 주변을 기어다닌다. 파리는 살아 있다. 세 배나 더 크고 운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때 파리는 동물이다.”(9쪽) 소설은 차우셰스쿠 정권의 붕괴 후에도 독재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참함을 드러낸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김인순 옮김)는 뮐러가 독일 망명 1년 전인 1986년 발표한 작품으로 ‘이주(移住)의 발라드’로 평가받는다.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의 횡포가 심해지던 시기, 두려움과 기다림 속에 서구 세계로 이주를 기다리던 독일 소수민들의 황량한 내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사과나무 뒤에 모피가공사네 창문이 걸려 있다. 창문들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저 친구는 여권이 나왔어.’ 빈디시는 생각한다. 창문들은 눈부시게 밝고, 유리는 헐벗었다. 모피가공사는 살림살이를 모조리 팔아치웠다. 방들이 텅 비었다. ‘저 사람들 커튼을 팔았군.’ 빈디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29쪽)

삶의 핵심을 뚫고 들어가는 짧고 간결한 문장과 상징적인 형상으로 인해 난해한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찬찬히 곱씹으면 깊은 의미의 차원이 열리면서 감탄을 자아낸다.

‘마음 짐승’(박경희 옮김)은 차우셰스쿠 지배하의 루마니아를 벗어난 주인공이 불안과 공포 속에 보낸 청춘을 돌아보는 기록이다. 헤르타 뮐러가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세상을 떠난 두 친구를 위해 쓴 작품”이라고 밝힌 소설로, 독일로 탈출하고 나서도 여전히 고통받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 친구는 독일로 이주한 후 이민자 임시숙소에서 창문을 열고 투신했고 다른 친구는 루마니아의 자택에서 목을 맨 것으로 가족들에게 통보되었다. 부검은 허용되지 않았다.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자장가에서 착안한 제목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삶 속에서 거대하고 흉물스런 발톱을 세우며 불안해하는 자아의 그림자이자 상처입고 그늘진 초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할머니의 자장가는 너무나 평화로운 가사로 되어 있다. “나 오늘 잠들기 전에/오, 주여 당신께 내 마음을 바치오니”

자장가가 끝나면 딸깍 불 끄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 어린 뮐러는 어떻게 마음을 하늘에 바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음 짐승’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불안과 두려움이다. 침묵과 말 사이를 오가던 뮐러의 내면은 성장 이후 ‘말이 머물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데 그곳에서 그는 단어와 사물 사이의 빈틈을 통해 무(無)를 응시하고 그녀만의 조어를 만들어낸다. ‘마음 짐승’은 그런 언어조탁의 과정을 통해 태어난 단어다. 헤르타 뮐러는 국제비교문학회 강연 외에도 문학동네, 대산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는 낭독공감(19일)과 사인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갖는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