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하면 역효과 책 읽는 아이 부모가 만든다

입력 2010-08-13 17:27


“책 읽기 싫어하는 자녀에게 억지로 읽히지 마세요. 그건 폭력입니다. 책 많이 읽는다고 국어 성적도, 논술 실력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태풍에 실려 온 비바람이 지나고 햇볕이 쨍쨍하던 지난 11일 오후, 서울 역삼동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4층 강당은 잠시 술렁였다. 그럴 수밖에. 그날 강당에서 진행된 프로그램은 어린이·청소년 독서 지도에 관심 있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마련된 여름방학 독서특강 ‘나를 변화시키는 독서법’이었다. 독서법을 알려주기는커녕 책을 억지로 읽히지 말라니, 또 성적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 엄마들로선 기가 찰밖에.

강사로 나선 철학자 탁석산씨는 독서는 취미이며,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이어서 공부에는 특히 방해가 되는 취미임을 강조했다. 뿐인가. 고등학교 3년 내내 책만 읽다가 대학입시에서 떨어져 재수했다는 자신의 경험까지 들려줬다. 그리고 엄마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까지 했다.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독서는 공부에 지장이 없는 한, 공부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이지요.”

그는 ‘책 속에 지혜가 있다’는 말도 요즘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온갖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서는 취미로 접근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책을 읽히고 싶다면 대형 서점이나 도서관 등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시키라”고 했다. 드디어 엄마들은 ‘그러면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메모를 시작했다.

“시원하고 먹을 데도 있는 대형 서점들 서비스 좋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1시간 정도 풀어놨다 꼭 먹는 데서 만나기로 하세요.”

아이들은 처음에는 먹을 것에 끌려 기꺼이 나서게 된다. 그러다 점차 책이 주는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할 것이라고. 탁씨는 여기서도 ‘따끔’ 침을 놓는다. 책 속에 풀어놓는 것이 효과가 없어도 절대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것. 왜냐고? 독서는 취미니까. 낚시를 싫어하는 이에게 낚싯대를 쥐어 주며 강가로 내몰면 낚시를 더욱 싫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다시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책과 친해지기 시작한 아이들은 드디어 책을 들고 와서 ‘이거 사 주세요’ 합니다. 무조건 들어 주세요. 부모가 책을 골라선 안 됩니다. 자녀가 선택권을 가져야 합니다.”

만화책이든, 판타지 소설이든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라는 말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아이가 야구 만화책을 들고 왔을 때 “뭐야, 이거! 학습만화도 아니잖아. 다른 거 골라와!” 이렇게 말하는 순간 아이들은 마음을 닫고 독서라는 취미생활과는 담을 쌓게 된다는 설명에는 ‘아이고’ ‘어쩌나’ 외마디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벌써 한건 한 엄마들이 적지 않은 분위기다.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읽다 보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야구 만화에서 야구 책으로 옮겨가고 스포츠로 영역을 넓히지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이들이 탁씨의 말 한마디에 ‘푸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부모가 책 읽는 모습 보인다고 해서 따라 하지는 않습니다. 책 읽는 척, 쇼하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과(?)가 있는 엄마들이니 웃을 수밖에.

“독서는 생업과 관계없는 취미로 학생의 생업인 공부, 즉 성적 올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취미지만 매력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취미입니다.” 취미임을 계속 강조했지만 드디어 그 값어치를 드러내는 탁씨의 말에 엄마들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요즘 모든 직종은 실력 있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그중 매력 있는 사람이 살아남게 마련이지요.” ‘매력덩어리’로 자란 아이를 상상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독서는 습자지에 물이 스며들 듯 천천히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무서운 것은 생각입니다. 사람을 지배하는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책입니다.” 어느새 독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탁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책을 제대로 읽었나 확인하려 들지 마세요. 독후감도 강요하지 마십시오.” 왜? 독서는 아무래도 취미니까. 다시 강의 주제를 상기시킨 탁씨는 “독서는 노후대책으로 최고”라며 엄마들을 독서의 세계로 초대했다. “비용도 많이 들지 않고, 다양한 영역을 섭렵할 수 있으며, 뇌 운동이 되고, 소일거리로도 그만이지요.” ‘맞아.’ ‘그렇지.’ 옆 사람과 맞장구까지 치는 이들. 아마도 이들은 주말 아이들과 함께 대형 서점에 가서 스스로를 위한 책을 고르지 않을까. 이날 강의는 KBS 1라디오 여름방학 특강 ‘지혜로운 부모 되기’의 하나로 마련됐다. 17일 오후 5시10분 방송된다. 탁씨는 ‘성적은 짧고 직업은 길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 등의 저서가 있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