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사모를 도웁시다-국민일보·세복협 공동캠페인] 박대식 목사와 사별한 김인태 사모

입력 2010-08-13 19:35


간병·파출부 일하며 빠듯한 생계 “아들 신대원 학비는 꼭 마련해야죠”

인천 석남동 460번지. 허름한 주택가 반지하 9평짜리 연립주택에 살고 있는 김인태(61) 사모의 집 안은 마치 사우나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후끈거렸다. 집이 작아선지 내부가 너무 더워 종일 땀을 흘린다는 김 사모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전남 무안에서 남편(박대식 목사)과 어렵지만 행복하게 농촌 목회를 했다. 그런데 간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던 남편이 지난해 3월 10일 소천하자 김 사모의 형편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성도들이 몇 안 되는 어려운 농촌 미자립교회였지요. 그래도 새 목회자가 초빙됐고 당장 살던 사택을 비워야 하는데 자식들을 데리고 도무지 갈 데가 없었어요. 어렵게 2000만원을 빌려 남편과 시골로 내려가기 전까지 살았던 인천으로 왔답니다.”

고 박대식 목사는 청소년시절 ‘작은 예수’라고 불릴 정도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출석교회에서는 박 목사를 미국 유학까지 보내 목회자로 키울 생각이었으나 다른 길로 가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목회자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40세에 신학교(총신 87회)에 입학, 뒤늦게 목회자가 됐다.

“인천에서 개척은 했지만 남편은 농촌 목회를 더 원했어요. 그래서 경남 의령에서 5년간 목회하다 2005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무안으로 내려왔지요. 이 교회는 신학생들만 계속 왔다가 가곤 하던 교회였는데 목사로는 남편이 첫 부임이었지요.”

10여명의 성도가 있었지만 사례금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며 성도들을 섬겼고 성도들도 조금씩 늘어나 보람이 있었다. 전형적인 시골교회로 부족한 것은 많았지만 성도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정을 두텁게 쌓았다.

“남편이 2007년 받은 건강검진에서 간암이 발견되고 힘들게 투병생활을 시작했어요.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는데 병원비 마련이 참 힘들었어요. 저희는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한 번도 대학 등록금을 챙겨주지 못했어요. 늘 학자금 대출을 받고 각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당했지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이에요.”

자녀 이야기에 금방 눈물을 글썽이는 김 사모는 어린이집 교사로 있다가 출가한 딸(30)과 야간 신학교를 다니며 낮에는 일하는 아들(32)이 지금까지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 아들은 고생하는 부모를 보며 목회자는 안 되겠다고 했는데 남편이 임종한 뒤 교단의 노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신학교에 가겠다고 해 김 사모가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

김 사모는 요양사 자격증을 따 틈틈이 환자돌보기와 파출부, 청소 등 잡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관절이 좋지 않아 힘든 일을 못하다 보니 한 달 수입이 50여만원에 불과하다.

“그래도 항상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고 저도 기도할 시간이 많으니까요. 무안 농촌교회 성도들이 요즘도 가끔씩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곤 해요. 참 그곳이 좋았는데….”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목사 사모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했었다는 김 사모에게 요즘 기도제목을 슬쩍 물어 보았다. 어렵게 지내는 생활 중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빚도 빨리 갚아야 하지만 아들의 신학대학원 학비만큼은 제가 마련해주고 싶어요. 지금은 야간이라 낮에 일하면서 신학교에 다니지만 신대원은 야간이 없어 아들이 학비를 벌 수 없거든요. 일을 더 하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선지 일거리가 별로 없네요.”

삶을 벅차하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은 김 사모는 남편을 목포의 한 납골묘에 안치하는 바람에 자주 가볼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인천=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