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그의 옷 갖고 싶었나, 천상으로 떠난 거장…‘패션 거목’ 앙드레 김, 75세로 별세
입력 2010-08-13 00:16
한국 패션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앙드레 김(본명 김봉남)이 1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앙드레 김이 1982년 입양한 아들 중도(30)씨는 이날 오후 “아버님이 2005년 5월 대장암 수술을 받으셨다. 항암 치료를 해오시다 올 7월 12일 폐렴 증세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환자실에 계시다 오늘 오후 7시25분 돌아가셨다”고 발표했다.
‘패션 대사(fashion ambassador)’로 불리던 앙드레 김은 한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다. 1935년 서울 구파발에서 농사를 짓는 집안의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난 고인은 고등학교 졸업 후 61년 고(故) 최경자씨가 설립한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입학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를 한 이후 서울 소공동에 의상실 ‘살롱 드 앙드레’를 열었다. 64년 당대 최고 인기 배우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 때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해 유명해졌다. 이후에도 유명인들이 그의 옷을 즐겨 입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도 무대에 설 때 고인의 옷을 입었다. 88년 서울올림픽 땐 한국 국가대표팀의 선수복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66년 한국 디자이너로는 처음 프랑스 파리의상조합 초청으로 파리에서 컬렉션을 연 이후 미국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 10여개국 20여개 대도시에서 패션쇼를 했다. 그 때마다 기립박수를 받았다. 고인은 ‘패션 한국’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97년 패션 디자이너로는 처음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8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의 패션에 대한 열정과 기여도는 외국에서도 인정받아 99년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11월 16일을 ‘앙드레 김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프랑스 4대 장관급 훈장의 하나인 예술문화훈장을 받았다.
2003년부터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특별대사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쳐 온 고인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9개의 신문을 정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순수의 상징이라며 흰색 면 옷을 고집했던 그는 진한 메이크업, 독특한 말투로도 유명했다. 클로즈업한 사진에서 잡티가 거슬려 이를 가리기 위해 화장을 시작했다는 그는 파운데이션과 파우더를 바르고 눈썹과 아이라인, 마스카라까지 했다. 머리도 검정 스프레이를 뿌려 단장했다.
독학으로 영어를 익힌 그는 외국 패션쇼에서도 통역 없이 인터뷰를 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븃팃풀’ ‘환타스틱’ 등 발음이 독특해 희화화되기도 했지만 그는 한국적 자존심이 스며 있는 발음이라면서 외려 자랑스러워했다.
“삼국시대 이후 우리의 궁중복과 화려한 비잔틴 예술이 모든 작품의 기본 모티브”라고 밝혔던 그의 옷은 세계인들을 매혹시켰다. 빨강 주황 보라 물색 파랑 갈색 등 한국적 원색의 오간자에 용 사슴 나비 잉어 꽃 새 등이 아플리케로 수놓인 칠겹옷은 그의 작품세계를 가장 잘 드러냈던 작품이다. 살로메가 계부인 헤롯왕을 유혹하기 위해 춤출 때 입었던 세븐 베일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칠겹옷에 그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의 한과 그리움을 담았다”고 말했다.
올 3월 중국 베이징에서 ‘프리뷰 인 차이나 2010’ 기념 패션쇼를 했던 그는 “자금성에서 패션쇼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등에서 세계 최초로 패션쇼를 했던 그가 욕심을 낼 만한 일이었지만 이제 그 꿈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게 됐다.
문화계 인사들은 앙드레 김 별세 소식에 한결같이 “문화계의 큰 어른이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고인과 함께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한 소설가 박완서씨는 “유니세프를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헌신적으로 하셨고 큰 도움을 주셨다. 패션은 물론 지속적인 기부와 봉사로도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1999년 ‘옷로비 사건’ 청문회 때 김봉남이라는 본명이 밝혀져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던 그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당당히 밝히곤 했다. 이제 그는 앙드레 김이라는 영광스럽지만 무거운 그 이름을 버리고 자연인 김봉남으로 돌아갔다. “20세기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태어나 21세기까지 활동했으며, 패션을 종합예술로 승화시킨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던 그는 이제 천상에서 그 꿈을 이어갈 것이다. 유족으로는 아들 중도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6일 오전 6시, 장지는 충남 천안시 천안공원묘원(02-2072-2091).
김혜림 선임기자·김수현 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