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성혜영] 밥상 차리는 여자

입력 2010-08-12 18:37


배우 황정민의 수상소감 덕분에 좀 엉뚱한 곳에서 회자되었지만,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 얹기’가 소원인 사람은 따로 있다. 밥상 차리는 여자들이다. 애들이 크고 나서는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는 일도 드물고 보니, 상 차리는 일이 정말 성가시다. 오죽하면 ‘영식님, 삼식X끼’라는 우스개까지 생겼을까.

그렇긴 해도 좋은 사람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걸 나는 좋아한다. 누군가 차려놓은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 얹고 맛있게 먹는 것이 소원이지만, 문제는 모두 바쁘고 피곤한 사람들뿐이라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딸아이 말로는 자업자득이고, 남편 말로는 팔자가 좋아서다.

시작은 이랬다. 술과 친구 좋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편의 늦은 귀가를 참다못해 차라리 집에 와서 한잔 더 하라고 한마디 했더니, 그때부터 우리 집은 3차 전용 술집이 되어 버렸다. 내 친구이기도 하고 내 후배이기도 한 경우가 많아 박대는 못 하고, 취객들 상대하기가 힘들어 작전을 바꾸었다. 술 말고 밥 먹으러 오라고. 밥상에는 자고로 반주가 있어야 하는 법,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근사한 요리를 해서 대단한 파티를 자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꾀도 나고 나름대로 요령도 생겨서,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사계의 권위자’와 ‘무림의 고수’들을 밥상머리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훨씬 크다. 또 마음이 중요할 뿐, 격식으로나 요리로나 지나친 상차림은 손님을 불편하게 한다는 나름대로의 ‘무기’가 예나 지금이나 잘 통한다.

그럭저럭 교토 생활을 정리할 때가 가까워 이곳 일본인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던 참에, 남편 친구의 부인으로부터 ‘교토 최고의 한국음식점이 문을 닫게 되어 유감’이라는 메일을 받았다. 호들갑이다 싶은 일본의 인사치레를 감안하더라도 좀 과했다. 메뉴를 더듬어 보니 아보카도를 곁들인 비빔국수와 참치김치전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 전통 음식에 대해 모르는 바도 아닐 터, 이리저리 손이 많이 가는 전통음식 대신에 ‘창작요리’라 우기면서 내놓은 국적불명의 음식으로 최고의 한국음식점 대접을 받으니 낯이 뜨거워졌다.

생각해 보면 나도 고급 식당의 ‘가이세키(會席)요리’라는 십수 가지 코스의 전통요리보다, 조금 어수선했지만 사람 냄새 나는 ‘그(녀)가 사는 집’에서 받았던 소박한 밥상에 더 감동하지 않았던가. 바로 누군가 차려주는 밥상에 대한 로망에 다름 아니다. ‘감기도 밥상머리에서 떨어지고 정도 밥상머리에서 붙는다’는 그 밥상. 비밀은 ‘정(情)’이지 싶다. 맛도 전통도 그 다음이다.

그놈의 정과 칭찬이 언제나 치명적 유혹이다. 모종의 음모가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들 때쯤이면 객지에 사는 큰아이가 꼭 한번씩 추임새를 넣는다.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다고. 아, 나도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얹고 맛있게 먹는 게 소원이라고!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