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길에 점점이 배어있는… 한민족의 숨결, 발자취를 더듬다
입력 2010-08-12 17:59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정수일/창비
드넓게 펼쳐진 사막에는 길이 없다. 그저 사람이 지나간 자국이 곧 길이다.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은 낮에는 해를 벗 삼고, 밤에는 별과 달을 지표 삼아 초원을 오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이 초원 실크로드다. 실크로드는 동서 문명이 어떻게 교류되고 발전했는지 전 과정을 알고 있다.
“문명교류가 있다면 길은 필히 있다는 것이며, 교류와 길은 바늘과 실이다. 길을 연구해야 교류의 과정이나 교류물의 원류, 그 접변 과정을 바르게 알 수 있다”고 머리말에서 밝힌 정수일(76)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은 세계적인 실크로드 전문학자다. 정 소장은 2007년 6월부터 2년여에 걸쳐 초원로를 대흥안령 초원로, 몽골 초원로, 동·서시베리아 초원로 등 네 구간으로 나눠 직접 답사했다.
우선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대흥안령 초원로는 우리 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이 길의 입구는 선양이다. 초원로의 어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초원로를 찾아 떠날 때면 으레 이곳에서 신발끈을 묶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우리의 고대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자라와 물고기가 만들어준 다리를 타고 강을 건넜는데, 전설 속의 강은 바로 선양의 훈강이다.
저자는 네이멍구 초원 서북단에 위치한 떠떠우위가 고구려의 서경임을 확인하고 벅찬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곳에서 동북공정과 같은 중국의 부당한 역사의식이 번져가는 것도 포착하며, 올바른 역사의식과 대응책 마련을 촉구한다.
중국 북서쪽 끝에 있는 신장웨이 우얼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 있는 훙산 또한 우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옥을 처음 만든 훙산 유적터에서 출토된 옥기들은 곰 형상을 하고 있다. 재단터 아래에서는 곰 아래턱뼈가 발견됐다. 저자는 이것이 단군조선의 상징인 곰 토템과 연관됐다는 추측을 조심스레 내놓는다. 희미하나마 유사성이 발견되는 만큼 섣불리 ‘문명 단원주의’를 주장하는 태도는 지양하자고 말한다.
중국 북부 국경지대에 있는 몽골족 자치구인 네이멍구에 있는 우란하오터는 현재 우리 문화가 꽃피는 곳이다. ‘붉은 도시’를 뜻하는 이 곳은 조선족 1만여명의 터전이다. 네이멍구에서 유일하게 고등반과 초등반을 갖춘 조선족 학교는 현재 우리 동포가 처한 위태로운 현실을 보여준다. 이곳 학생들은 조선어 교제를 읽지 못할 정도로 한국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선족 부모들이 자녀의 출세를 위해 한족학교로 보내거나, 한국행을 결정하면서 조선족 학교는 점차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저자는 “안타깝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귀곡천계’의 정 나눔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차창 너머로 너울거리는 어린 고사리손들을 보며 “부디 불사조로 모진 세파를 헤치고, ‘민족후대’로 무럭무럭 자라 달라”는 염원을 속으로 되뇌인다.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는 몽골 초원로는 자연의 위엄으로 여행객을 압도한다. 사방이 탁 트인 사막천지를 지나다보면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끼게 된다. 또한 험난한 사막을 헤치고 문명을 전파한 선조들에 대한 감탄이 절로 든다.
몽골은 유독 우리와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몽골 지역의 바얀올기박물관, 울란바토르 민족사박물관에는 쟁기와 맷돌, 곰방대와 안장 등 우리 것과 유사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생활습속이 우리와 유사한 몽골을 보면서 혹자들은 ‘국가연합론’을 주창하는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성을 무시한 채 유사성만 강조한 나머지 우리의 문화의 원형을 몽골에서 찾는 자세는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몽골과 우리의 유사성을 과장하거나 축소할 게 아니라 역사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고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발길이 시베리아 초원으로 옮겨가면서 저자의 사색은 한층 깊어지고 시야는 한결 넓어진다. 해빙기를 맞아 큰 홍수가 일어났고 구석기인들이 남하해 한반도 일원에 정착했다는 지질학계의 주장과 같은 과학적인 논리 외에도 시베리아 현장에서 보고 느낀 우리 민족의 얼 때문이다 우리 겨레의 애환을 싣고 나른 시베리아 연해주에 다다르면 시베리아와 우리의 문화적 상관성은 명백한 사실로 다가온다. 본문에 곁들여진 51장의 사진은 역동적인 초원길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