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금 목사 인터뷰

입력 2010-08-12 16:21


강남교회 전병금(67) 목사는 최근 인상이 조금 달라졌다. 바로 지난해 말 찍은 사진과 비교해도 차이가 난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워진 인상이다. “평생 왼쪽에 가지고 있던 가르마를 얼마 전에 오른쪽으로 바꿨어요.” 어쩐지 흘려듣게 되지 않는 말이었다.

전 목사는 ‘왼쪽’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한신대학교 50년사에는 전 목사의 이름이 뚜렷이 기록돼 있다. 신학생들이 사회 운동에 처음 뛰어든 역사로 기록돼 있는 1965년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그 뒤로 전 목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선배들인 김재준 송창근 목사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전 목사 개인적으로는 좀 더 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기도와 봉사에 철저했던 어머니로부터 보수적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또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의 영향도 있었다. 신학생 시절 고향 전북 군산에서 조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기도의 능력을 직접 체험했고 그 뒤로도 틈틈이 조 목사의 저서를 읽으며 기도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곤 했다.

때문에 처음 강남교회를 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은 보수적으로, 사회선교는 적극적으로”라는 철학을 지켜올 수 있었다. 다만 전 목사는 199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의 시기는 지났고, 교회는 이제 봉사라는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또한 2002년 기장 총회장을 지낸 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국교회연합추진특별위원회를 맡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과 NCCK의 연합을 추진했다. 거의 진전 단계에서 무산된 데 대해 전 목사는 “그 때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 같다”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분명히 연합을 원하고 계신다”고 말했다.

이처럼 좌우를 넘나드는 활동으로 비판도 꽤 받았다. 그러나 전 목사는 보수나 진보나 본질은 같다는 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목사님이나 터놓고 이야기하다보면 복음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미국과 북한에 대한 생각까지 궁극적으로는 같아요. 단지 교파와 개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달리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교회가 최근 급격히 성장한 데 대해 그는 “은퇴 전에 교회에 양육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싶어 3~4년 전부터 발 벗고 나선 결과”라고 말했다. “그 전까지는 나름대로 이름 있는 목사로서 어디가서 배우기가 민망했는데, 교단 총회장까지 지내고 나니까 오히려 거리낌 없이 배우러 다닐 수 있겠더라고요.”

전 목사는 이제 ‘오른쪽’으로 왔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균형을 중시할 뿐이라는 것이다. 화제를 모았던 지난달 국가조찬기도회에서의 설교는 그 하나의 증거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서도 창조질서 보전에 대해 가차 없이 설파하는 한편 기독교인의 겸손과 기도의 중요성에 무게를 둔, 어느 쪽에서나 고개를 끄덕일 설교였다는 평을 받았다.황세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