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제왕무치·좌동우언(帝王無恥·左動右言)
입력 2010-08-12 19:16
조선시대 왕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없었다. 하다못해 용변할 때조차 주위에 상궁 나인들이 시립해 있었다. 왕이 매우틀(이동식 변기)에 변을 보면, 흰 수건을 들고 서 있던 상궁이 뒤를 닦아 주고, 다른 나인은 변 위에 재를 덮어 침전 밖으로 들고 나간다. 밖에 기다리고 있던 내의원 의관이 변을 살펴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것으로 왕의 ‘용변업무’는 마감된다. 용변 보는 일조차 여러 사람의 ‘감시’ 아래 치러야 했으니, 다른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모든 행위와 언사가 공개된다는 점에서, 왕은 완벽한 ‘공인(公人)’이었다.
왕도 사람인지라 이런 감시가 불편하고 불쾌하지 않을 리 없다. 이 감정을 억누르는 말이 ‘제왕무치(帝王無恥)’였다. ‘왕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니, 부끄러움이 없으면 당연히 거리낄 것도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든 남에게 내보이기를 가장 꺼리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의 ‘내밀한’ 신체와 사생활이다. 그러니 ‘무치(無恥)’는 곧 ‘무비(無秘)’요 ‘무사(無私)’이다. ‘공(公)’의 구현자인 왕은 누구에게든 비밀이 없어야 하고, 무슨 일에든 사사로움이 없어야 했으니, 왕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 철칙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왕의 일거일동은 관찰됐을 뿐 아니라 기록됐다. 왕의 좌우에 두 명의 사관이 따라다니면서 왼쪽 사관은 왕의 동작을, 오른쪽 사관은 왕의 말을 기록하는 것이 오래된 법이었으니, 이를 ‘좌동우언(左動右言)’이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왕 곁에 붙어 서서 언행을 기록하는 전임사관만 8명이었고, 직무에 관련된 일을 기록해 사초(史草)로 제공하게 돼 있는 겸직사관도 50명이 넘었다.
왕은 관찰하는 시선과 기록하는 붓에 완벽하게 포위돼 있었다. 더구나 사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철저히 보장됐다. 사관들 스스로 당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공정한 기록을 남길 수 있음을 잘 알았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은 이 집중적이고 공정한 관찰과 기록의 산물이다.
왕에 관한 기록은 이뿐이 아니었다. 인조 원년(1623)에는 승정원에서도 왕의 언행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영조 36년(1760)부터는 왕의 일기 형식으로 ‘일성록’도 펴냈다. 왕과 주요 신하의 언행, 국가 대소사에 관한 정부의 논의 과정과 조처, 지방 각처에서 올라온 상소문 등 조선왕조 국정 운영과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이 이들 기록에 담겼다.
자기 언행이 공개되고 기록된다는 사실을 아는 한, 스스로 언행을 삼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물론 기록자의 눈을 피해, 기록되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일이 결정되는 것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있었다. 그러나 기록의 그물망이 촘촘할수록 그런 기회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조선왕조가 두 차례의 혹독한 외침(外侵)을 거치고도 500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이 ‘삼가는’ 정치에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멸망과 더불어 우리의 기록문화도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 총독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은 게 없다. 남아 있는 기록도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일본 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왜곡된 기록만 넘쳐났다. 사실을 담은 기록은 대개 ‘비(秘)’ 또는 ‘극비(極秘)’ 표시를 해 일본인 관리들만 열람하는 ‘나쁜’ 선례만 남았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도 기록국가의 역사를 이으려는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수많은 자료들이 행정 참고용으로만 사용됐을 뿐 후대의 평가를 기다리지 않고 폐기됐다.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했으리라 의심되는 사안일수록 더했으니, 한국 현대사를 바꾼 중요 사건 중 하나인 ‘강남 개발’에 관해서는 그 흔한 백서 한 권 남아 있지 않다.
상당한 유예 기간을 허용한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지 이제 겨우 10년이다. 이 법이 아직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는데 정부가 기록물 폐기를 쉽게 하는 방향으로 법을 고치겠다고 나섰다. 기록은 권력의 ‘사사로움’과 ‘비밀스러움’을 견제하는 최선의 장치다. 구린 구석이 많은 권력이나 기록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현재에나 미래에나 당당하고 떳떳한 권력이라면 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데 인색할 이유가 없다.
전우용<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