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는 ‘미치광이 마을에 갇힌 올빼미’… 美 월간지가 소개한 ‘대통령의 백악관 25시’
입력 2010-08-12 18:23
2013년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람 이매뉴얼 전 백악관 비서실장이 티셔츠를 팔고 있다. 퇴임한 워싱턴 거물들이 운영하는 이 가판대에는 한 가지 색깔과 크기의 셔츠만 구비돼 있다. 선택에 지친 이들에게 ‘고르는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서다.
경제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건강보험 논쟁은 히틀러가 등장하는 악담의 경연장으로 돌변했던 지난해 12월. 24시간 풀가동하는 백악관 생활의 속도와 긴장에 지친 오바마 대통령은 은퇴 계획에 대한 농담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티셔츠 색깔은 흰색.” 오바마의 선언에 이매뉴얼 비서실장이 응수했다. “크기는 미디엄.” 하와이 해변의 티셔츠 가판대가 상징하는 건 ‘선택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국내외에 산적한 현안, 그리고 백악관을 24시간 감시하며 스캔들을 제조해내는 언론…. 적군에 포위된 듯 꽉 막힌 오바마의 백악관 생활을 미국 월간 ‘배니티페어’ 9월호가 이매뉴얼 비서실장, 로런스 서머스 국가경제위원장, 로버트 기브스 대변인 등 백악관 핵심 인사의 증언으로 전했다. ‘워싱턴, 문제 있어(Washington, we have a problem)’라는 제목의 기사는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들이 오바마와 같은 환경에서 일했다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라고 물은 뒤 워싱턴의 속도전과 적대적 미디어를 비판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서머스 위원장은 클린턴과 오바마 시대를 이렇게 비교했다. “클린턴 시절에는 하루 일과에 일종의 리듬 같은 게 있었다. 뉴욕 증시가 폐장하고 신문 마감시간이 다가오는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워싱턴은 서서히 속도를 높이며 달렸다. 그리고 휴식했다. 이제 그런 시대는 갔다.” 리언 패네타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워싱턴이 마치 카페인에 취한 것처럼 미친 듯이 달린다”고 말했다. 거친 언행과 직설법으로 악명 높은 이매뉴얼은 계속 빨라지기만 하는 워싱턴을 ‘미치광이마을(fucknutsville)’이라고 불렀다.
“세계는 지나치게 작아지고 반응은 너무 빠르다. 한 사람이 한 대의 컴퓨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엄청난 소동을 생각해보라.”(데이비드 액설로드 백악관 선임고문) “월터 크롱카이트(CBS 저녁 뉴스 앵커) 같은 언론인이 어떤 정보가 신뢰할 만한지 도장을 찍어주던 시대가 그립다.”(밸러리 재럿 백악관 선임고문)
미디어 환경에 대한 오바마의 인식은 최근 백악관 출입기자단과 가진 만찬에서 드러났다. 그는 ‘만약 폴리티코(미 정치전문지)가 남북전쟁 중인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해 보도한다면?’을 주제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오바마가 뽑은 폴리티코의 가상 제목은 ‘연방을 구한 링컨, 하원 다수당 지킬 수 있을까?’였다. 모든 걸 정치투쟁으로 환원하는 미디어를 비꼰, 뼈있는 농담이다.
매일 오후 백악관 정례 브리핑은 기괴하고 비뚤어진 의식이자 코믹극장으로 묘사됐다. 지난해 경기부양법안 발표 후 백악관 브리핑에서 벌어진 일은 지엽적 스캔들에 골몰하는 워싱턴 미디어의 문제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례였다. 첫 질문자였던 AP통신 기자는 사상 최대 규모의 경기부양법안 효과 및 파장 대신 ‘경제위기 속에서 대통령이 두 딸을 위해 백악관을 리모델링하는 게 적절한가’를 물었다. 질문권을 얻기 위해 언론이 벌이는 브리핑룸 자리다툼에 대해서는 “바보 같은 관행이지만 너무 뿌리 깊은 전통이어서 어떤 행정부도 이를 바꿔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대통령이 하루에 감당하는 업무는 어느 정도일까. 배니티페어가 관찰한 4월의 어느 수요일 오바마 책상에 쌓인 현안 목록은 이랬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일어난 광산사고 수습, 퇴임하는 존 폴 스티븐스 연방대법관 후임 선정, 애리조나 이민법 대처, 연방긴급구호자금 부족 문제 해결. 물론 재정적자와 월가 개혁, 고실업, 중간선거, 아프가니스탄 전쟁 같은 장기 현안도 기다리고 있다. 이외에도 오바마는 항소법원 판사 1명을 지명하고, 주 법무장관 7명과 연방경찰 6명을 임명했다.
기사가 전하는 대통령의 하루. 오바마는 매일 새벽 백악관 3층 개인 체육관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가족과 아침식사를 마친 뒤 두 딸의 등교를 지켜본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무실에 도착하는 시간은 대략 9시25∼30분. 첫 일정은 이매뉴얼의 3∼5분 브리핑이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이미 2∼3건의 스태프 미팅을 마친 비서실장의 임무는 전 세계 상황을 5분 안에 요약해 전달하는 것이다.
퇴근시간은 오후 6시∼6시30분이지만 대통령 업무는 저녁식사 후인 오후 8시∼8시30분쯤 재개돼 자정 이후까지 이어진다. 보좌관들이 대통령의 이메일과 전화를 받는 게 이즈음이다. 전 세계에서 취합한 정보 보고서도 밤사이 전달된다. 늦게 자고 늦게 출근하는 오바마 스케줄은 ‘아침형인간’이었던 전임 조지 W 부시 대통령보다는 ‘올빼미형’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가깝다는 평이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