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코지 입김에 정치풍자 어려워… 한국은 어때요?”
입력 2010-08-12 18:17
‘르몽드’ 시사만화가 셀축 데미렐 화첩에 담은 한 달간의 한국 여행기
그는 말보다 그림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경남 통영은 어떻던가요?”
말을 하려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포기한다. 대신 작은 붓펜과 메모지를 꺼내 그리기 시작했다.
“말보다 그림이 편해요.”
인터뷰는 내내 이런 식이었다. 질문에 돌아오는 건 태반이 조각그림이다.
셀축 데미렐(56). 프랑스 유력 신문 르몽드의 시사만화가. 부인 리리안느(58)와 함께 한국을 여행하고 있는 그를 지난 3일 전남 여수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부부의 여행은 이날로 14일째를 맞았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저널리스트
셀축은 터키 출신이다. 고교생이던 1973년 터키 앙카라 신문에 그림을 실으며 데뷔했다. 78년 파리로 건너가 건축 공부를 했고, 80년부터 프랑스 신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 르몽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등 프랑스 언론사 4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한국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그의 그림이 실린다고 한다.
98년부터는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신문·잡지에도 그림을 싣기 시작했다. 최민 전국시사만화협회장은 “셀축의 만화는 회화 작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같은 터키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도 그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파묵은 자신의 최근작 ‘순수박물관’에 등장하는 소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터키 이스탄불에 박물관을 만들고 있다. 셀축은 여기 전시품들을 그릴 예정이다.
셀축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일러스트레이터이면서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중적”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프랑스 신문에서 시사만화의 위치는 아주 중요합니다. 시사만화 자체가 독립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르몽드는 사이즈가 아주 큰 그림을 첫 페이지에 싣기도 해요. 중요한 기사가 있을 때 기사 내용을 그림 한 컷으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거죠.”
유럽의 시사만화가는 한국 신문사의 ‘화백’과 조금 다르다. 기사 옆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오피니언 면에 그림을 기고하기도 한다. 만평가와 삽화가를 겸임하는 것이다. 삽화는 통상 신문사로부터 구체적으로 주문을 받아 그리고, 시사만화는 자유롭게 여러 장을 그려 신문사에 보낸다. 그 중 하나를 신문사가 선택하는 식이다.
첫 한국 나들이
이번 여행은 부부의 첫 한국 나들이. 지난해 6월 한국에서 열린 국제시사만화 포럼에 발표자로 초대받았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못 왔다고 한다. 중국 싱가포르 등은 진작 돌아봤다. 아시아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지난달 21일 서울에 도착한 부부는 경북 안동·경주, 부산, 경남 통영을 거쳐 여수에 닿았다. 전남 보성과 전북 전주를 거쳐 제주도까지 가는 일정이 남아 있다. 14일 프랑스로 돌아간다.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묻자 “음식이 맛나고 사람들이 아주 친절하다”는 간결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곤 잠시 후 또 조각그림을 건넸다. 통영 앞바다에서 바라본 작은 섬들, 인산인해를 이룬 부산 해운대의 피서객들을 그린 그림이다. 그 그림들이 한국 여행 소감인 셈이다. 여행은 늘 이런 식으로 흐른다. 그는 그림으로 여행기를 남긴다.
여수 오동도길에 위치한 여수엑스포 전시관을 돌아보다 출구에 놓인 방명록으로 다가갔다. 부인은 이름과 사인을 남겼지만 셀축은 붓펜을 꺼냈다. 방명록 한지 무늬를 살려 여수 바닷속 풍경을 그려 넣었다.
“셀축은 어딜 가든 그림을 그려요. 항상 그림 생각뿐이죠.”
부인은 놀랍지 않다는 듯 남편이 그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셀축에게 여행은 상상력 자극제다.
“여행은 영감을 일으키는 데 가장 중요해요. 평소엔 집에서 일하는데, 이때도 머릿속으로는 항상 여행을 다니죠. 예전에 한 유명 기자가 저에 대한 글을 썼는데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하더군요.”
아! 사르코지
최근 프랑스 언론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갈등이 심하다. 사르코지는 대통령 취임 후 공영방송인 ‘프랑스 텔레비지옹’ 대표를 직접 임명해 논란을 일으켰다.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사르코지 정책을 비판해온 이들이 퇴출됐는데 여기에 사르코지가 관여했다는 의혹도 있다.
셀축은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이후 정치 풍자가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신문사와 많이 협의하고 있다. 그림을 수정하기도 한다.”
셀축이 일하는 르몽드에도 사르코지 입김은 닿아 있다. 얼마 전 르몽드는 새로운 경영자를 찾는다고 발표했다. 사르코지는 르몽드 사장을 불러 자기 친구와 가까운 후보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르몽드에 대한 국가 지원을 끊겠다고 했다. 사르코지의 언론 장악 시도가 프랑스 사회를 달궜지만 르몽드가 좌파 성향 컨소시엄에 인수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셀축은 “이전 대통령도 자신과 가까운 인사를 언론계에 심곤 했지만 사르코지처럼 노골적이진 않았다”며 불쾌해했다. 그는 ‘파리 마치(Paris Match)’ 사건을 언급했다.
“2005년 8월 프랑스 최대 주간지 파리 마치는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사르코지의 부인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어 내보냈죠. 이후 잡지 편집장 알랭 제네스타가 갑작스레 해임됐어요. 사르코지가 그렇게 한 거죠.”
셀축은 그림을 통해 사르코지를 자주 비판한다. 이 때문에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외부에서 비판은 항상 있어요. 기자들이 제 그림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니까요. 정치적 압력도 한 번 있었는데 저에게 직접 들어온 건 아니었어요. 신문사로 들어왔죠. 하지만 신문사가 나를 보호해줬어요. 르몽드의 경우 독립신문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사르코지라 해도 전화하기 쉽지 않아요.”
그는 내년 1월 다시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지난해 참석하지 못했던 국제시사만화 포럼 발표자 자격이다.
“시사만화가는 자유로워야 해요. 그리고 자신을 멀리서 보고 자기 의견을 스스로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좋은 시사만화가가 되기 위한 핵심입니다.”
여수=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