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우리江을 걷는다] ④ 섬진강 꽃 기차길과 17번국도
입력 2010-08-11 17:30
철길따라… 강길따라… 두루마리 남도 풍경화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중략)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중략) 그을린 이마 훤하게 / 꽃등도 달아준다 /(중략)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김용택의 시 ‘섬진강’ 중에서)
전북 진안의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실핏줄 같은 개울을 하나 둘 보듬고 전라도를 흐른다. 전남 곡성의 옥과면에서 옥과천과 합류한 섬진강은 곡성읍에서 요천을 만나 제법 강의 모습을 갖춘다. 그리고 옛 곡성역이 위치한 섬진강기차마을에서 침곡역과 가정역을 거쳐 보성강과 합류하는 압록유원지까지 13㎞ 구간을 17번국도 및 전라선 철길과 함께 두루마리 풍경화를 그린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대구역으로 나온 옛 곡성역은 기차를 테마로 한 추억의 공간. 코스모스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역사에는 전시용 증기기관차를 비롯해 각종 기차가 과거로의 여행을 안내한다. 역사 옆에 재현한 1960년대의 여수 골목길은 영화 ‘아이스케키’를 촬영한 세트장.
앞뒤에서 고풍스런 모양의 기관차가 끄는 5량짜리 증기기관차가 기적소리와 함께 하얀 증기를 내뿜는다. 플랫폼을 가득 메운 설레는 가슴들이 줄지어 증기기관차에 오른다. 전라선 개량공사로 폐선이 된 철로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는 금세 17번국도 및 섬진강과 어깨동무를 한다. 증기기관차가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섬진강과 17번국도가 유려한 곡선을 그린다.
유홍준씨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우리나라 도로망은 남북으로 발달했으나 강은 대개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오직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섬진강만이 강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길을 만들게 했다”며 물금∼원동∼삼랑진 철길과 하동∼구례∼곡성 찻길을 극찬했다.
곡성 찻길이 바로 17번국도로, 아름드리 버드나무 가로수는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채 강바람에 몸을 맡긴다. 17번국도는 섬진강레일바이크의 출발역인 침곡역을 지나자마자 호곡나루터 줄배를 만난다.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줄을 당겨 사공 없이도 혼자 강을 건너는 줄배는 호곡마을과 강 건너 바깥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 지금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침곡교와 두계교가 줄배의 역할을 대신한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17번국도는 두계교 상류에서 마천목 장군의 도깨비살을 만난다. 강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돌로 보를 쌓은 살은 물고기를 잡는 일종의 독살. 고려 말의 장군인 마천목은 소년시절에 도깨비의 도움으로 물살이 빠른 섬진강에 독살을 쌓아 어머니에게 줄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곡성에는 효녀 심청과 관련한 전설도 전해온다. 심청전의 원류로 추정되는 관음사 연기설화가 그것으로 가정역 인근의 송정리에는 한옥체험을 위한 심청이야기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증기기관차와 섬진강레일바이크의 종착역인 가정역은 슬픈 사연을 간직한 두가현수교와 연결되어 있다. 1979년 두가리에서 강을 건너던 줄배가 뒤집혀 마을 사람 6명이 익사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1981년 두가현수교가 세워졌다. 현재의 두가현수교는 1997년 홍수로 교각이 붕괴됐던 두가현수교를 튼튼하게 보수해서 만든 것.
‘섬진강 꽃 기찻길’로 명명된 17번국도는 가정역에서 압록유원지까지 섬진강 래프팅 보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여행을 떠난다. 압록유원지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압록교 아래 금빛 모래사장은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17번국도와 나란히 달리는 도로는 9번군도. 압록유원지에서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예성교를 건너면 호젓한 강변길인 9번군도를 만난다. 강변길을 따라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강 건너 가정역이 한눈에 들어오는 곡성섬진강천문대가 나온다.
천문대 앞은 배롱나무 꽃이 멋스런 강변 자전거도로로 연인을 태운 은빛 동그라미들이 섬진강변을 따라 오르내린다.
자동차가 줄지어 달리는 17번국도와 달리 9번군도는 찾는 사람이 없어 한적하다. 두가현수교 상류의 두가세월교 주변은 강수욕을 즐기거나 다슬기를 잡는 피서객들의 세상이다. 세월교(洗越橋)는 큰비가 내리면 물에 잠기는 잠수교로 농촌체험으로 유명한 두계산골외갓집체험마을 주민들의 줄배 역할을 한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원두막이 멋스런 두계산골외갓체험마을은 한때 은어잡이로 유명했다. 요즘은 섬진강 은어도 귀하신 몸이 됐지만 옛날에는 은어를 잡아 자식 대학공부를 시킬 정도로 흔했다.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계속되는 9번군도는 뺑덕어멈고개를 넘으면 더욱 호젓해진다. 길섶에는 마천목장군 도깨비살을 상징하는 귀여운 도깨비 동상이 방망이를 든 채 섬진강을 지키고 있다. 도깨비 동상이 위치한 곳은 섬진강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포인트로 산굽이 사이로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강줄기가 산수화를 그린다.
봄에는 철쭉이 피고 여름에는 백일홍이 아름다운 9번군도는 고달마을에서 막을 내린다. 고달마을에서 강을 건너면 처음 출발했던 섬진강기차마을. 서편제 가락처럼 애절하게 흐르는 섬진강을 사이에 둔 길과 길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서로 마주보며 향수에 젖는다.
곡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